지상철 3호선을 타고 서상돈 선생의 묘를 찾아가 보았다. 3호선 종점인 범물역에 내려서 범안삼거리 조금 지나면 가톨릭 범물공원묘원을 관리하는 건물이 나오는데, 여기서 조금 더 고산 쪽으로 가면 성묘객 통행로 표지판이 보인다. 밭둑을 따라 50여m쯤 오르면 서상돈 선생의 묘가 있다.
선생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로 1850년 10월 17일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아버지 서철순과 어머니 김해김씨 아가다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경북 문경, 상주 등지로 피난하다가 1859년 대구 죽전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신앙 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가산도 탕진했으며, 1866년 선생의 나이 18세 때 쌀, 소금, 지물 및 포목상을 시작하여 대구 제일의 거상이 되어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1894년부터 1903년까지 정부의 특명으로 정삼품 통정대부, 탁지부 세무시찰관으로 경상도 세정을 총괄하는 시찰관에 임명되었다. 1906년 김광제 선생 등과 대구광문사를 조직하고, 대구농공은행 대구민의소를 설립하였다. 협성학교, 수창학교를 설립하는데도 기여하였다. 1907년 1월29일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고 2월 21일에는 대구민의소에 단연회를 설립했다. 북후정에서 최초의 민중대회인 군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경북국채보상도 총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다. 서상돈 선생은 1913년 6월 30일 대구에서 서거하였으며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선생의 묘 왼쪽에 있는 비석의 뒷면에는 4명의 아들과, 14명의 손자 이름이 새겨져있다. 비석은 서기1954년 11월에 건립 되었다고 적혀 있으며, 묘 왼쪽에는 우리말로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몇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구약성서에 백향목이라 하여 70여 회나 등장하는 나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기둥으로 사용되어 천주교와도 인연이 깊은 나무다. 둘째 아들의 묘는 선생의 묘 아래에 있었다.
대구교구청에 선생이 심은 개잎갈나무가 있다. 교구청 안에는 성모당, 성 김대건기념관 등이 있는 대구가톨릭의 심장부가 있는데, 그 입구 계단에 크기와 굵기가 비슷한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밑에 서상돈 수식(손으로 심음)이라고 쓴 표석이 있으며, 교구청 안에는 서상돈의 흉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