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경건강대학, 전선재 강사의 안보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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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해일 기자
  • 승인 2023.12.1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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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 전쟁의 어려움 염해일 기자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의 교훈

하마스는 1982년 창설된 반이스라엘 무장단체로 범아랍권 이슬람 조직이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주장하는 과격파가 독립해 나온 단체이다.

이스라엘군이 미국 유엔 유럽연합 등의 주도로 체결한 “중동평화 로드맵(2005년)을 이행하러 가자지구로 들어가자 철수한 이듬해인 2006년 하마스는 총선에서 온건파를 제치고 대승하였다.

하마스는 2007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구 가자지구를 독재 지배하고 있었다. 하마스 무장세력은 3만 2,000명이고, 일반시민은 230만 명이다. 하마스는 군사 자금 등을 주로 이란에서 지원받아 유대인을 완전히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남서쪽에 있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 지중해 해안 길이 50km 폭 5~8km인 지역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발발한 중동 전쟁에서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정착촌을 만들어 유대인을 이주시켰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정착촌이 불법점거라며 철수를 요구하여 유대인 정착촌과 군인을 모두 철수했다. 이후 하마스가 통치하여 분쟁 지역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장벽을 설치하였다.

가자지구 전쟁의 어려움은 첫째, 저격/시야 확보가 용이 한 건물 곳곳에 숨어 이스라엘 병사와 기갑 장비를 공격하고 있다. 둘째, 민간인 방패/ 민간인 거주지와 각종 공공시설 한 건물 안에 숨어 있다. 셋째, 땅굴/가자지구 지하에 약 500km의 땅굴이 거미줄처럼 뻗어 각 건물과 연결하여 놓아 AI 로봇, 특수부대의 작전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1948년 5월 14일 지중해 동쪽 연안에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거주지를 잃게 된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인들은 이스라엘과 1차 중동 전쟁을 벌이고 이스라엘의 승리로 종전되었다.

이스라엘 영토는 이스라엘과 서안, 가자지구(팔레스타인) 등 셋으로 나누어져 있다. 1993년 8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자 국가를 세우고 평화적 공존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오슬로 협정’에서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 서안지구의 자치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협정 이후에도 군, 경찰들을 철수시키지 않고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초기 정부와 집권당의 부패 무능은 하마스의 득세로 이어졌다.

국제사회는 도로, 학교 등 사회 기반 시설 확충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지원했다. 하마스는 지원받아 땅굴 파는 데 쓰는 등 본래 목적과 다르게 유용하였다.

이스라엘은 적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1년 전부터 하마스 도청을 중단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공격을 당하였다. 대한민국은 이스라엘 전쟁을 교훈으로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

방위산업 강국 대한민국 염해일 기자

기적으로 이룬 대한민국

근대 민족 수난 일제강점기(1910~1945)에 조정 무능과 부패로 일본 패권 대응에 소홀히 하여 우리나라에서 청일전쟁(1894년), 러일 전쟁(1905)이 벌어져서 강제노역(29만 명)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30만 명)가 발생하였다.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1945. 8. 6. 8.9) 하여 우리나라가 해방과 정부수립 하였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소련이 북한 진주(1945.9)하여 스탈린이 북한의 정권 수립을 지령 하달하였다.

1945, 12 모스크바 삼상회의(미, 영, 소)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였으나 신탁통치 반대하였다. ‘46~’47, 1, 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로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 이관하여 유엔의 결정으로 총선을 실시하였으나, 북한은 1946, 2 북조선 임시 인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대한민국 총선거 시행(1948, 5, 10)하여 헌법을 제정하여 1948. 8. 15 정부 수립(자유민주주의 공화국)하여 12월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유엔에서 승인하였다. 북한은 1948. 9. 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을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이 1950년 대북 정세 둔감, 국론 분열과 국방 소홀을 틈타 북한이 불법 남침한 6.25 전쟁으로 군인 전사자 178,569명, 민간인 사망자 373,599명이란 엄청난 재산과 인명 피해가 생겼다.

전쟁 초기에 한국군 병력 105,752명인데 비해 북한군 병력은 198,380명, 한국군 탱크 0대인데 비해 북한군 탱크 242대, 한국군 야포 91문인데 비해 북한군 728문, 한국군 함정 71척인데 비해 북한군 110척, 한국군 항공기 22대인데 비해 북한군 항공기 226대로 전쟁하였다.

냉전을 공식화한 트루먼 독트린은 지중해 국가들에 대한 더 이상 원조 여력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이들 국가가 소련의 영향권 내에 들어갈 위협에 처했다. 그래서 종전엔 미국이 침략받지 않은 한 중립을 지키겠다는 정책을 포기하고, 냉전을 공식화한 트루먼 독트린(1947년 8월)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여러 나라에 대해 군사,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선언으로 미국이 한국전쟁 개입을 선언하였다.

미국(트루먼)의 한국전 적극적으로 가담한 동기는 소련은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을 노릴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의 자국 방위 의욕 상실하여 3차 대전의 도화선이 될 것이다. UN이 승인한 나라인 한국에 북한 무력 침공을 막기 위하여 가담하였다.

안보리 82호 의결(6.25)로 38선 이북 철수 촉구로 유엔군 지원(63개국), 전투부대 16개국 1,938,330명, 의료지원 5개국 3,132명, 물자/전투복지원 32개/10개국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1950년) 한강 방어선 전선 시찰하던 중 호를 지키는 서병수 일병을 보고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저의 상관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던가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했다. 맥아더 장군이 “지금 자네의 소원은 무엇인가?”물었다.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무기와 탄약을 보내 주십시오. 그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무기와 탄약을 지원받았다. 서병수 일병의 기적이 일어났다.

칠곡 다부동에 투로먼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나란히 세워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을 파병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한미동맹의 토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UN 한국 재건위원회 대표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한국이 재건하려면 100년은 걸려야 한다.”라고도 했다. 1960년 지표 1인당 국민소득 76불(세계 120개국 중 119위)이었다.

그러던 한국이 지금은 방위산업 강국이 되었다. 2021년 방산 수출 사상 첫 70억 달러 돌파(세계 6위)가 되었다. 2022년 방산 수출 추진 내용은 지난해 8월 계약 체결 후 약 4개월 만에 초도 물량이 현지에 도착했다. 가성비, 신속 공급으로 미국, 독일을 제치고 무기 수출했다.

폴란드에 K2전차, K9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 총액 25조 8,000억 원 규모, 지원 장비 등 포함하면 40조 원 이상 수출하였다. 호주에 레드백 장갑차 50억-75억 달러, 말레이시아 FA-50 경공격기 7억 달러 이상, 노르웨이 K2’흑표‘ 전차 17억 달러, 사우디아라비아에 천궁 요격미사일 최소 20억 달러, 비호복합 20억 달러, 콜롬비아 FA-50 경공격기 약 10억 달러 수출하였다.

노르웨이, 메스토니아, 루마니아,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슬로바키아, 아랍에미리트에 200억 달러 한화 25조 900억 원 계약하였다. “K방산 위해 100만 달러 써 달라”고 미국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국민 통합으로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하기 위하여 기성세대가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기초질서 확립, 호국보훈 정신, 나라 사랑 정신 함양, 한미동맹과 안보 역량 강화로 자유민주주의 자부심으로 국가정체성을 수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