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평화는 지켜질 수 없어
더위가 시작되는 유월이다. 녹음 짙은 산은 더위를 식히며 휴식 시간을 가지려는 이들을 유혹한다. 더위를 느끼게 하는 날이 이어지면 도시 가까이에 무성한 숲을 가진 산의 등산길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그런 산이 아니라도 오르고 싶겠지만 6월을 맞아 한번쯤 오르고 싶은 산이 있다면 유학산(遊鶴山)이다.
이 산은 코흘리개 동무들이 모여 진달래 한 움큼 꺾고 할미꽃 붉은 입술을 만지며 놀다 떼굴떼굴 구를 수 있는 뒷동산의 모습은 아니다. 고향(학상동)마을 앞 가까이 남서 방향에 있는 산이지만 경사가 급하여 어릴 적엔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해마다 이 무렵 산을 찾고 싶은 건 푸른 숲이 울창하여서도 아니고, 고향을 마주한 산이라 그런 것도 아니다. 동족 간 전쟁을 치른 산으로 큰 상처를 지니고 있어서다.
유학산을 비롯한 주변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다부원(동)전투라고도 부르는데 유학산이 그 중심이었다. 오래전부터 조부모 산소에 벌초하러 가거나 명절을 맞아 집안 어른을 뵙기 위해서 그 산 옆으로 난 구안국도를 오가야 했다. 그럴 때면 처참했던 戰場의 상상화가 늘 뇌리에 떠올랐다.
1950년 8월, 이산을 두고 무려 아홉 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만큼 격렬한 혈전이 벌어졌다. 837고지는 대구 사수의 요충지였으며 328고지를 두고서 무려 15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아군과 적군 간 불을 뿜는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치렀던 전투에서 아군이 졌더라면 인민군은 쉽게 대구와 그 이남을 점령하였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전쟁 중 가장 치열하고 끔찍한 전투로 아군과 적군을 합한 희생자 수가 가장 많았던 산! 빗발처럼 쏟아졌던 총탄과 하늘도 놀랄 만큼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던 수류탄 파편들. 산을 오를 적이면 장렬히 산화한 젊은 국군 용사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초록 짙은 골짜기에 피 솟는 몸 휘청거리며 절규하던 장병들. 굉음과 함께 화염을 뿜으며 내 쏟았던 박격포의 포격으로 산 짐승들도 그 얼마나 놀랐으랴. 새들의 보금자리와 흙 속에 지어진 개미집마저 그 어느 한 곳이라도 성한 데가 있었으랴.
실탄이 떨어져 급기야 상호 백병전이 벌어졌다. 개머리판으로 치고받거나 날카로운 총검으로 찌르고 찔리며 벌였던 육박전으로 얼마나 많은 국군과 인민군이 죽어갔을까. 청춘의 피가 용솟음칠 이 삼 십 대 나이에 안타깝게 죽어간 모든 젊은이들, 아군이건 적군이건 그들의 부모는 평생 그들을 가슴에 묻고 지내느라 임종인들 어찌 편안했으랴!
유학산 근처 마을에 살았던 팔십 대 중반의 자주 만나는 한 노인의 말에 의하면 유학산 전투에는 16세에서 17세쯤 되는 인민군 병사도 참여하여 전사했다고 했다. 죽은 소년 병사의 수가 대략 얼마나 되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볼 파란 고운 나이에 끔찍한 전쟁에 동원되어 이슬처럼 사라졌으니 비록 적군이라 할지라도 가여운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는 전투에서 죽은 이들 중에는 16세의 보국대원도 있었다고 한다. 보국대원은 아군을 뒤따르면서 식량이나 탄약 등을 운반하거나 밥 짓는 일을 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복무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양한 나이대의 보국대원 중 인민군의 흉탄에 쓰러진 앳된 보국대원도 있다고 했다. 요즘 16세쯤 되는 나이라면 라면 부모에게 매달려 어리광 피울 나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가 꺾어져야만 했을까?
겹겹이 쌓여 있었던 주검을 껴안았던 산은 그 끔찍함에 얼마나 놀랐으랴! 그림자 없는 밤이면 무서움에 그 얼마나 몸을 떨었으랴! 신선을 태워 날아다니며 천년을 산다는 학이 노닐었다는 산의 이름이 무색하게 어찌 그리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단 말인가.
이제 그 처참했던 전투가 있은 지 올해로 71년이 되는 해다. 전쟁의 상흔을 가진 산도 인생으로 보면 고희를 훌쩍 넘긴 셈이다. 총성이 멈춘 후 산은 오랜 세월 동안 끔찍한 상처로 얼마나 신음했을까. 전사자 중 아직도 유골이 발견되지 못한 이가 있을 것이며 그들의 고혼(孤魂)은 산을 맴돌고 있으리라.
지난해 별세하신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은 치열했던 유학산 전투의 산 증인이었다. 한때 그는 중앙일보를 통해 '평화 시에 항상 전쟁을 생각, 대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유학산 전투를 회고하면서 강조하였다. 자신이 물러서면 '부하로부터 자신을 쏴라'고 할 만큼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하여 고지를 지켜낸 그의 말은 백번 지당하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거나 그 참상을 전혀 들은 바 없는 세대라면 더욱 그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유학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기에 대구와 그 이남이 온전할 수 있었다. 그 산과 용감히 싸운 백 장군과 용사가 있었기에 국토의 일부가 건재했다. 그러기에 백 장군의 투철한 정신과 용사의 혼이 깃든 유학산을 ‘護國의 聖山’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젠 유학산 전투가 벌어졌을 무렵 생존하였던 이들이 이승을 많이 떠났다. 금후 15년 ~ 20여 년이 지나면 당시의 유학산 전투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거의 유명을 달리할 것이다. 생존해 있는 칠십 대 이상의 세대 중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후세에게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알려 평화의 소중함과 자유의 가치를 일깨워야 하리라.
평화가 없는 자유를 상상할 수 없다. 자유 없는 평화 또한 그렇다. 그 둘은 공존한다. 그런데 평화와 자유가 어찌 공짜로 주어지는 걸까. 평화는 힘이 있어야 지켜진다. 너무나 자명한 전쟁사적 진실이다. 문 대통령은 한때 "경제가 평화다"라고 외쳤지만, 그보다는 국군 통수권자로“힘이 평화다”라고 말해야 한다. 힘을 발휘하려면 무엇이 갖춰져야 할까? 힘을 기르지 않는 나라의 지도자가 말로만 외치는 평화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