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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스케치
icon 유병길
icon 2020-07-01 09:30:04  |  icon 조회: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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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가 김 사장과 단둘이 레스토랑에서 첫 만남을 약속한 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손질하고 입고나갈 옷을 고르다 영희는 자신도 여자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아이들 남매 저녁을 차려주고 친구 만나려 간다는 말을 하고 약속 장소에 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보니 분위기가 어색하였으나, 마음이 급한 김 사장이

“이제 마음을 열고 제 마음 받아 주시겠죠?”

“저도 많이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마음이 심란해요.”

잠시 머뭇거리든 영희가

“단 조건이 있어요, 우리가 만나도 마음만 만나야지,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면 전 안 만날 거예요"

"네, 좋아요. 건전한 마음으로 만나요. 고맙습니다."

김 사장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망설이다가 김 사장의 손을 살며시 잡아 약속 도장을 찍고,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영희는 김 사장과 만남을 약속한 때문인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와서 비밀 일기장에 붙이지 않을 마음의 편지를 썼다.

『k씨께! 밤새 뒤치다가 눈을 떠보니 새벽 4시가 조금 지나고 있네요. 웬일일까요. 가슴은 두 근 반 세 근 반 뛰고, 머리도 복잡하고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친구 숙자가 열두 살 많은 띠 동갑인 남 사장을 만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욕하며 친구로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남사장과 셋이서 몇 번 만나고 보니 숙자를 이해 할 것도 같았어요. 숙자 남편은 몇 년 전 열병 후유증으로 발기부전 환자가 되었고,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던 숙자가 남 사장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 많이 밝아졌어요. 몰래 만나는 사랑의 힘이란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러나 나는 남편 외에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아요.

남 사장친구인 김 사장을 소개받고 같이 몇 번의 만남이 있은 후 오늘 둘이 만났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가슴을 파고드는 k씨라는 사람에 대해 호감이 가고, 알 수 없는 정이 끌린다면 믿으시겠어요? 오늘 이후론 k씨와의 만남을 오래오래 유지하면서 변함없이 믿고 의지하면서, 마음 놓고 따르고 싶다는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저씨?, k씨? 어떻게 호칭하면 더 가까운 느낌이 들까요? 아저씨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고요. k씨는 또 나이 차이를 너무너무 의식하지 않은 것 같고요. 그래도 k씨가 더 나은 것 같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누구를 생각하면서 보고 싶고,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 참 행복한 것 같아요.』

매일 만날 수 없어 전화는 자주하였는데, 오늘은 부산친구 소식 때문에 목소리가 많이 어둡게 들렸나 보다.

“영희씨 무슨 일 있어요?”

“부산에 있는 친구가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앞뒷집에서 자란 짱 친구인데 큰언니 동창인 5살 많은 동네 오빠한테 성폭행당하고, 계속 만나다가 임신 되어 열아홉에 결혼했어요.”

“그 친구가 예쁘고 끼가 있었나 봐요”

“그렇지는 않았는데, 자궁암이고 다른 장기에 전이가 되어 손을 쓸 수도 없고 몇 달 못 산데요. 병문안이라도 가고 싶은데 혼자 가려니 엄두가 안 나요.”

“숙자씨 하고 같이 가지요”

“숙자는 중학교 친구라 그렇게 안 친해요”

전화를 끊고 김 사장은 도와줄 방법을 궁리하였다. 사무실에 와서 생각하니 영희와 둘이서 부산에 한번 갔다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열차 시간을 알아보고 영희 집에 전화하여 다짜고짜

“내일 10시 30분 부산행 열차가 있어요, 예매할게요. 10분 전에 대구역에서 만나요”

“예~?”

전화가 끊어졌다. 영희는 황당하였으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김 사장은 10시 30분 부산행 2장, 18시 대구행 2장을 예매하였다.

대구역에 먼저 도착한 영희는 시간 맞추어 도착한 김 사장을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달리는 열차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김 사장이

“영희씨 하고 데이트하고 싶어서 예매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부산이 가까워지자 밖이 캄캄하여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영희가 김 사장을 만날 때는 시샘을 하는가? 단둘이 처음 만나는 날, 용연사, 앞산, 팔공산 갈 때도 비가 내렸다.

영희가 병원에 들어가면 그 주위에서 시간을 보내려했는데, 비가 내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영희씨 병원에 갔다가 올 동안 난 어디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있을게요.”

“네, 피곤하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세요.”

부산역에 내려 작은 양산을 같이 쓰고 빗길을 건넜다. 골목 안 00여관에 들어가 2층 방문을 여니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베게 2개가 눈에 들어 왔다. 영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걸쳐 앉으며

“좀 쉬세요. 빨리 갔다가 올게요.”

영희가 일어서는데 김 사장이 다가서며 팔을 벌려 가볍게 안겼다가 밀치고 방을 나왔다. 김 사장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았는데 깜빡 졸은 것 같았다. 병원에 갔다가 들어오면 한번 안아 볼까? 아니야 약속을 지켜야해. 마음의 갈등은 다시 잠을 자려 하여도 잠은 오지 않고 눈이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영희는 아픈 친구를 만나서 좋았는데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보니 후회도 되었다. 같이 안고 많이 울었다. 부산역으로 오는 버스에 앉으니,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사는 숙자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사장 깨우려 방에 들어갔다가 나를 원한다면,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또 한편으로는 안 된다고 한다. 고마운 김 사장이 빨리 보고 싶었다.

김 사장이 밖을 내다보니 언제 비가 그쳤는지 햇빛이 쨍쨍하였다. 시계를 보니 16시다. 영희가 깨우려 다시 들어온다면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아 밖에서 기다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옷을 입고 큰길에 나가니 환하게 웃으며 영희가 걸어오고 있다.

“안에 있으니 너무 답답하고 비도 안 오고.... 친구는 어때요?”

대답 대신 영희는 눈시울을 붉혔다. 열차에 앉아 영희는 말없이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인생이란 한번 왔다가 한번 간다. 일찍 가거나, 늦게 가거나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 일찍 간다고 서러워하지 말고 좋은 기분으로 보내주어야 친구도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를 김 사장 어께에 살며시 기대자 손을 잡아 주었다.

아이들 저녁을 차려주는 남편을 보면서 미안하여 부산 친구이야기를 하였다. 잠이 깬 영희는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 평생 잊지 못할 시간들! 9월 어느 날 어느 시간쯤 가는 선로로 흘러나오던 너무나 근사한 그 한마디 "몇 시쯤 예매할까?" 아니 이럴 수가…….

놀란 가슴을 달래고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잠시 침묵. 그때 그 순간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기쁜 마음과 설레 임으로 목적지를 향하여, 이이와 그이는 끝도 없이 오손 도손 많은 정담을 나누었지.

피곤해하는 그이를 여관에 두고 혼자 떠나야 했던 심정. 그이는 알까? 모를까? 아쉬움과 미안함을 뒤로 한 채. 잠시 떠났다가 몇 시간이 흘렸을까? 그이와 이이는 다시 반가운 만남. 그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체, 따뜻한 손을 맞잡고 수많은 얘기를 나누었든 시간들을 잊을 수가 없다나. 오늘은 진짜로 너무너무 고마웠습니다. 함께 해준 시간들 잊지 않을게요.』

한 달에 네 번 남편이 야근하는 날 저녁에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가정, 공장, 세상사 모든 문제에 대하여 정담도 나누고, 가요방에서 신나게 놀았다. 못 만날 땐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도 하였다. 영희는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에 전보다 더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아내로, 더 좋은 엄마 노릇을 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일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처음 약속과 같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순수한 만남을 지속하였다.

김 사장은 영희를 만나고 공장 일이 너무 바빠서 낮에 잠시 시간 내기도 힘들었지만, 가끔 점심식사는 같이 할 수 있었다. 공장이나 가정에서 속상할 때 영희를 만나 툭툭 털어 버릴 수 있어 행복했다. 영희도 남편한테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소화가 잘 안되어 바늘로 손가락 끝을 따기도 많이 했는데, 김 사장을 만나고 일 년이 넘도록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어 너무나 좋았다.

비 오는 늦가을 유원지 식당 방에서 점심을 먹고, 벽에 등을 기대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영희는 앞 머리카락이 내려와서 눈을 덮으니, 머리를 김 사장 쪽으로 획 획 돌려 머리카락을 올리는데, 그땐 서로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가 되곤 하였다. 그때 김 사장이 얼굴을 옆으로만 돌리면 입맞춤은 간단할 것 같았다. 받아 줄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마음의 갈등이 계속 되었다.

서로 손을 잡을 수가 있고, 김 사장이 팔을 벌리면 살짝 안겨주고, 김 사장을 무릎에 누이고 흰머리 가락을 뽑아주는 정도의 스킨십을 하였다. 얼굴이 획 돌아올 때 김 사장이 큰마음을 먹고 오른손을 올려 턱을 잡고 입맞춤을 하였는데,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을 하여 입을 뗐다.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끼우고 “엉 엉” 울기 시작하였다.

영희는 일 년 이상 약속을 지켜준 김 사장이 존경스러웠는데, 오늘의 돌발행동은 약속위반이라 화가 많이 났다. 집 뒷길 내리던 곳에서 내리려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다급하게

“ 빨리 지나가요. 앞에 애들 아빠가...”

우산을 쓴 남자가 지나갔다. 차가 오른쪽 골목으로 돌아서자, 세워달라고 손짓을 한다.

“영희씨, 오늘 미안해요.”

대답도 안하고 횡~ 내려서 뛰기 시작하는 영희, 뒷모습을 보니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순간의 갈등을 참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 같았다. 오! 부처님, 하느님, 저의 잘못을 용서하세요. 영희의 마음에 상처가 없도록 도와주세요.

영희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남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서 그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를 다시 읽어 보고 마지막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사랑 할 수 없는 당신께! 지난 일 년 동안 너무나 과분한 사랑을 받아 행복했답니다. 저도 삼십대의 피 끓는 여인입니다. 당신이 하나하나 신경 써서 챙겨 주실 때, 제 마음도 수없이 흔들렸답니다. 숙자가 남사장하고 몰래 사랑을 하며 새로 태어난 것처럼 행복하다는 말을 하였을 때, 나도 못 이기는 척 당신의 넓은 가슴에 안겨 깊은 잠에 빠져보고 싶은 생각도 하여 보았답니다. 그러나 나는 가정을 지키고 싶습니다. 만약에 당신과 사랑에 빠진다면 헤어나지 못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모릅니다. 당신을 더 이상 만난다면 내 마음을 내가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아 더 이상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고 만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못난 저를 빨리 잊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연애편지 일기는 사랑과 함께 내일 태워버리기로 결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혼자 커피를 마시며 다시 생각을 하여 보아도 결론은 어제 저녁과 같았다. 창고에 있는 연탄 화덕을 마당에 내 놓고 일기장과 사진 라이터를 가지고 나왔다.

일기장을 찢는 심정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난 일 년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가슴속에서 울컥울컥 할 때마다 피눈물이 솟구쳐 나온다. 라이터 불길이 찢어진 일기장에 붙고, 김 사장을 좋아하였던 연민의 정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른다. 그때 김 사장의 전화가 왔다.

“전화하지 마세요. 안 받을 거예요.”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가 몇 번이나 왔으나 영희는 받지 않고 연애편지와 사진을 다 태우고 방에 들어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말았다.

2020-07-01 09: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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