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글마당

시니어 글마당 시니어매일은 독자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는 신문입니다. 참여하신 독자께는 소정의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한때는?
icon 유병길
icon 2019-08-19 14:11:34  |  icon 조회: 381
첨부이미지

할아버지 농기구 창고에는 한때는 잘나가던 옛날 농기구들이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낫, 괭이, 곡괭이, 삽, 가래, 호미, 못줄, 곰배, 쇠스랑, 제초기, 갈퀴, 도리께, 삼태기, 짚 도리, 호롱, 초롱, 호야 등 작은 것은 벽에 걸렸습니다. 흑지, 쟁기, 써레, 지게, 똥 장군, 벼훑이, 멍석, 작두 등은 진열대에 놓였고, 디딜방아, 베틀, 달구지, 길마, 탈곡기, 풍구, 새끼틀, 경운기, 관리기, 바인더 등 큰 것은 밑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앞쪽에는 요즘 잘나가는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 등이 놓여 있습니다.

쟁기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일어섰습니다.

“여러분,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벼농사는 사람이 소 몰아서 일을 하다 보니 많이 힘들었어요.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만 바라보며 농사를 짓다보니, 비가 늦게 올 때는 모를 못 심어 흉년도 자주 들었어요. 흑지 쟁기로 소를 몰아 논을 갈고, 물을 대고 써레로 고르고, 피를 뽑으며 물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쪄서 벌모로 모내기를 하고, 호미로 논을 매고, 낫으로 벼를 베고, 도리깨로 두드려 타작을 하였어요.

그때 할아버지는 이십대 청년이었어요. 쟁기 흑지 써레 삽 괭이 등 농기구를 지게에 지고 소를 몰고 앞들 뒷들로 일하려 가셨어요. 흑지는 날이 고정되어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아야 논갈이를 하였지만, 나는 날을 좌우로 돌릴 수 있어 한 손으로 꼭지를 잡고 따라가며 논갈이를 할 수 있다고 할아버지가 좋아 하셔서 한때는 잘 나갔어요. 거의 매일 사용하는 괭이, 호미, 낫 등은 닳아서 무뎌지면 대장간에서 날을 세워서 사용하였어요.“

오래된 탈곡기가 맞장구를 쳤어요.

“쟁기 다음으로 오래된 고참으로 한때는 잘 나갔는데, 하는 일 없이 계속 놀고 있으니 미안해요.

8.15 해방이 되고 마을에서 농사가 많은 다섯 집이 어울러 나를 샀어요. 한 두 사람이 발판을 밟으면 ‘와롱’ ‘와롱’ 소리가나며 원통이 돌아갈 때 마른 벼를 한줌씩 잡고 원통에 대면 원통에 달린 강철 귀(브이 자가 거꾸로 박힌 것)에 받쳐 벼 알이 떨어졌는데 하루에 많은 량을 타작하였어요. 마당에 큰 돌을 놓고 끈으로 볏단을 감아서 어깨위로 올렸다가 돌에 내려쳐서 타작을 하거나, 볏단을 마당에 펴놓고 도리께로 두드려 타작을 하던 분들이 나를 많이 부러워했어요. 초련으로 벼 몇 단을 베어 타작할 때는 벼훑이나 수수깡을 접어서 훑었어요.”

“1960년대 후반부터 우리 마을에도 ‘달’‘달’‘달‘ 시끄러운 경운기 들어오면서 우리 쟁기와 써레도 할 일이 없어졌고, 일을 시키려고 집집마다 키우던 소가 없어지는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밥맛은 떨어졌지만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가 확대 재배되면서 보릿고개가 허물어지고 농가 소득이 올라 살기가 좋아졌어요. 편리한 경운기를 너도나도 사면서 우리 농촌도 기계화 영농이 시작되었어요. 1970년대 중반에는 경운기가 거의 모든 농가에 공급되었어요. 대부분의 농가는 전에 사용하던 농기구는 부수어 불을 때고 고물로 팔았지만 할아버지는 우리와 정이 들었다고 이렇게 보관하고 계시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우리 탈곡기도 경운기가 들어오고 변화가 왔어요. 철공소에서 탈곡기 원통 축에 바퀴를 달아 경운기와 벨트로 연결 힘 안 들이고 탈곡을 하였어요. 경운기 짐칸에 실려 들판으로 다니면서 탈곡기 앞에 서까래 세 개를 세우고 비닐 멍석을 치고 탈곡을 하였는데 지푸라기 먼지가 날아가고 깨끗한 벼가 나오는 탈곡기가 공급되면서 들판에서 타작을 하였어요. 한때 우리도 잘 나갔는데 어느 순간 밀려 났어요.

1980년대 후반 벼를 베면서 동시에 탈곡을 하는 새로운 기종인 콤바인이 공급되면서 너무나 편리하니까, 너도 나도 융자를 받아서 사다보니 우리도 낫과 같이 할일이 없어 졌어요.”

듣고만 있던 못줄이 한마디 하였어요.

“저도 1960년대 이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삐뚤삐뚤하게 벌모를 심었어요. 농촌진흥법이 공포되고 못줄사용에 대한 효과를 홍보하면서 못줄의 빨강 눈에 모를 심었고, 평당 포기수가 확보되어 수량도 많이 났어요. 줄 앞에 옆으로 서서 빨강 눈에 모를 다 심으면 양쪽 줄잡이가 ”야“ ”야“ 소리치며 못줄을 넘기고, 또 다 심으면 넘기며 반듯반듯하게 모를 심었어요. 벌모를 심을 때는 호미로 논의 풀을 다 맸는데, 줄모를 심으면서 손으로 미는 제초기가 공급 되었어요. 벼 포기 사이에 놓고 밀고 나가면서 힘 적게 들이고 논의 풀을 뽑았어요.

1979~80년 이앙기가 전국 군 단위 벼 기계이앙 시범단지에 공급되면서 기계로 모를 심다보니 우리 못줄도 설 자리를 잃었어요. 이앙기로 모를 심으면서 우리 농촌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야“ ”야“ 못줄 넘기던 소리가 없어지고, 모를 심던 많은 사람들과 밥을 얻어먹으려고 따라온 아이들 소리와 참 먹고 가라던 정겨운 소리도 없어지고, “이랴” “이랴” 소 부리는 소리, “음매” “음매” 울던 송아지 소리도 들을 수 없었어요. ‘부르릉’ ‘부르릉’ 이앙기 운전자와 모 상자를 실어주는 한 사람이 따라 다니며 모내기를 다하여 얼마나 쉬워졌는지 몰라요.”

이때 호미가 한마디 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에 온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우리 조상들이 일을 한 것이 제일 오래되었을 거야. 우리들의 허리를 봐 다 꼬부랑이잖아.”

낫, 괭이, 삽도 서로 오래전부터 일을 하였다고 다투었는데, 낫이 한마디 했어요.

“나만큼 오랫동안 일하는 농기구 있으면 나와 보래요. 젊은 우리는 요즘도 산소에 벌초할 때나 논둑을 깎을 때 일하고 있어요. 대장간에서 태어나면 몇 년 못 살고 죽지만 세종대왕님이 훈민정음 만들 그때도 우리 조상님을 보고 ‘기억’자를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삽, 괭이, 호미가

“우리도 그때 있을 것인데, 너는 세종대왕님이 보았다니 인정하마. 낫 너만 지금 일하는 것 아니야? 우리 삽, 괭이도 포클레인이 큰일하고 나면 뒷정리나 작은 일을 하고 있어, 우리 호미도 텃밭 풀매기를 하지만, 요즘 미국 아프리카 유럽 사람들이 우리의 성능을 알아보고 좋아하여 수출까지 한단다.”

쟁기가 한마디 한다.

“그래 낫, 삽, 괭이, 호미 말이 맞다. 옛날 농경시대의 농기구 중에서 아직까지 일하고 수출까지 하는 너희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축하할 일이다. 다 같이 축하 박수~~”

모든 농기구들이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경운기가 한마디 하였다.

“내가 처음 나왔을 때 소가 일하던 논갈이 써레질을 내가 다하였고, 우마차가 실어 나르던 짐을 내가 다 운반하였고, 탈곡기와 벨트로 연결하여 타작을 다하고, 분무기와 연결하여 농약을 치고, 양수기와 연결하여 가뭄때 물을 펴고, 농촌에서 하는 일을 거의 다하여 한때는 아주 잘 나갔어. 일하기가 편리하고 쉬운 만큼 사건 사고도 많아서 가슴이 아파. 부이벨트를 연결하다가 손가락이 잘리고, 음주운전하다 뒤집어지고, 차량과 충돌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았어.

큰 농장에는 수입산 대형 트랙터가 있었는데, 1970년대 중반 국산 소형 중형 트랙터가 생산되어 농가에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나도 일을 잃었어. 나는 쟁기 날이 하나지만 트랙터는 2~3개 달리고 속력이 빨라서 논을 가는데 수십 배 능률이 오르고, 로터리도 크고 무거워 빠르게 로터리작업을 하여 1980년대 중반에는 트랙터에게 넘겨주었어.“

바인더가 한마디 하였다.

“경운기는 많은 일 다 하였지만 나는 벼를 베는 일만하였어. 어른 손으로 한 줌정도 베면 자동으로 끈을 묶어 떨어트리는 기능이 있어. 10~15인의 몫을 하다 보니 대농가에서는 나를 많이 구입하였어. 낫으로 온 가족이 매달려서 벼 베기를 하였는데 일손을 덜어 좋아 했어. 콤바인이 공급되면서 나도 일자리를 잃었어.”

이앙기가 한마디 하였다

“보행이앙기인 내가 처음 나왔을 때 말도 많았어. 작은 상자에 모를 키우는 것을 보고 비웃었어. 45일 묘를 손모내기 할 때 모를 심고 돌아서면 논이 푸르게 어울렸는데, 상자에서 30일 키운 작은 모를 심고 보니 논이 다 비었다고 야단이 났어. 새로 모를 심는 사람도 있었어. 관행의 농법을 버리고 새로운 농법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아 기술센터 직원들의 수고가 많았어. 나중에 새끼치기를 많이 하여 논이 어울리니까 안심 하였어, 기계로 모를 심어도 수량차이가 없는 것을 몇 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다투어 이앙기를 사고 쉬운 기계모내기를 하여 한때는 우리도 잘나갔어. 2000년대 운전자가 올라타고 모를 심는 승용이앙기가 공급되면서 운전자가 힘이 적게 들다보니 우리 보행이앙기는 뒷방 늙은이가 되었어.”

경운기가 뼈있는 말 한마디를 하였다.

“달 달 달 들판을 누비며 모든 일을 우리가 할 때는 일 년 중 쉬는 날이 없을 만큼 바빴고 잘 나갔어요. 요즘은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보관하시며 들에 가실 때 타고 다니며 농작물을 운반하는 정도예요.

값비싼 대형 농기구인 콤바인 트랙터 승용이앙기를 융자를 받아 집집마다 경쟁적으로 구입하다보니, 일 년에 하루 이틀 자기 일만하고 놀고 있어 경제적으로 손실이 많은 실정이야. 사실 나도 배가 아파. 농가에 빚이 많이 늘어 난 것은 대형 농기구 구입할 때 빌린 융자금 때문이야. 빚이 억대가 넘는 농가가 많아.“

“맞아.”

모든 농기구들이 박수를 쳤다. 콤바인이 한마디 하였다.

“우리 동네 콤바인들도 자기 논 하루 이틀 일하고 다들 놀고 있어. 논 면적이 적은 농가는 여럿이 어울러 사서 공동으로 사용하면 좋은데, 서로 의견이 잘 맞지 않아 잘 안 되는 모양이야. 할아버지도 서울 작은할아버지 논을 합하면 6,000여 평 정도야, 한 곳에 있으면 하루도 안 걸리지만 앞들, 뒷들, 기말기들에 흩어져 이틀 정도면 끝나. 콤바인 있는 젊은 사람한테 부탁하다보니, 벼를 수확하고 싶을 때 하실 수 없다고 많이 속상해 하셨어. 그래서 아저씨가 마음 편히 일 하시라고 사드렸어. 다행이 친구 분들의 논 10,000여 평을 탈곡하여 융자금 상환하는데 보탬이 되실 거야.“

경운기가 또 한마디 한다.

“1970년대 우리 농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잘 살 수 있게 한 주역은 통일벼와 우리 경운기라고 말 할 수 있어요. 통일벼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보릿고개를 허물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행복과 경제가 성장하여 살기 좋은 농촌이 되게 하였어요. 우리 경운기는 힘을 적게 들이고 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계화 영농의 밑거름이 되었어요.

할아버지가 옛날 농기구를 사용하시며 일할 때 힘들었던 모습을 나는 다 보았어요. 축력을 이용한 농기구에서 원동기를 이용한 농기구인 발동기 경운기를 운전하시고, 지금은 전자식인 트랙터, 승용이앙기, 콤바인 등을 배워서 운전하시는 8학년 5반인 할아버지는 우리 농업의 산 증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요즘은 100% 기계화가 되어 쉽게 벼농사를 짓고 있으니, 농업인들의 생각도 바꿔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시군 단위 서너 곳, 큰 시군은 더 많은 곳에 농기구 빌려주는 센터를 만들어 원하는 농기구를 빌려주고 있으니, 자기 것을 사려고 하지 말고 많이 이용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농기구도 무인 기계화 쪽으로 발전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 같아요.”

“맞아요.”

그 옛날 증산의 역군이었던 모든 재래 농기구들! 지금은 늙고 병들어 뒷방으로 밀려나 구경만 하는 신세가 되었거나, 녹슨 고철로 팔려 나가고 있지만,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놓아 기분 좋아 하는 것 같았습니다.

2019-08-19 14:11:34
59.23.241.21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유준원 2019-08-19 20:56:27
아련한 기억들을 이글을보고 되살리며
잊혀져가는 우리의옛것을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