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글마당

시니어 글마당 시니어매일은 독자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는 신문입니다. 참여하신 독자께는 소정의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효부 정영욱 씨와 어머니
icon 유병길
icon 2019-07-22 15:24:42  |  icon 조회: 546
첨부파일 : -

대전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콧물이 줄줄 흐르는 감기가 심하여 내일 가기로 하고 수시로 전화통화를 하였다. 밤 아홉시가 넘어 위급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티슈 통을 들고 11시에 ktx 탔다. 김천을 지날 때 여동생이 “오빠 언제 오세요?” 문자를 보냈다. 예감이 이상하여 전화를 하니 어머니가 운명하셨단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였다.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코에는 콧물이 계속하여 흐르고, 머릿속에선 힘들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한 많은 삶이 뇌리를 스친다.

당시에는 스물두 살이 나이가 많다고 네 살짜리 아들이 있는 재취자리에 중매가 들어왔다. 거절하지 못하고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아버지와 결혼식을 올리고 할머니가 키우던 나를 맡아서 키우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공경을 하셨다.

첫딸 낳고 칠일 만에 6.25 동란으로 핏덩이를 업고 피난을 갔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경찰관이 되어 김천경찰서에 근무하면서 주말부부가 되었다. 둘째 딸이 태어나고 남대구서로 이동이 되었다. 시어른을 모시고 아이들을 키우며 대구로 살림날 계획에 행복하였는데, 1956년 여름 아버지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서셔 청상과수가 되셨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뱃속에는 8개월 유복자가 있었고, 두 달 후 아들을 낳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며 우리 사남매를 키우는 고생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나와, 큰 여동생이 결혼을 하였다.

우리 가족과 가정을 위하여 회갑을 지나시고도 들일을 다 하셨던 할아버지가 1974년 돌아가셨다. 할머니를 모시고 고향에 사시며 농사를 지어 작은 여동생, 남동생도 결혼시켰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고부간이라기보다 서로 친구처럼 의지하며 살아오셨는데, 할머니가 92 세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혼자 고향집을 지키며 농사일을 하셨다. 자신은 좋은 것 먹지도 입지도 않으며, 한평생을 자식들을 위하여 아끼고 아끼며 우리 사남매를 차별 없이 키워 주셨다.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위하여 가출하셨다면, 우리 사남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의 은혜에 항상 감사드리며 살았다. 대전 남동생도 남매가 태어나 행복한 삶을 살았는데, 갑자기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 조카 남매를 돌보기 위하여 어머니는 혼자 2년여 지켜오던 고향집을 비워두고 1994년 급히 대전으로 가셔서 그때부터 동생과 살았다.

집사람 고향친구가 여동생 정영욱(41세)씨를 소개하여 1996년에 전처소생의 딸(10세) 아들(6세)과 어머니(70세)를 모시고 있는 동생(40)과 결혼하였다. 어머니의 작은 며느리로 남매를 키우며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제수씨는 동생과 결혼하면서 ‘시어른 모시며 전처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어머니가 청춘을 다 바쳐 고생하신 이야기를 듣고 편히 모시려고 굳게 다짐을 하였다. 서울에서 미용사로 일한 경력을 살려 1층에 미용실을 개원하여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때는 골목마다 미장원이 많았으나 머리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많았다.

설, 추석 전날은 미장원 손님이 가장 많은 대목이지만, 제수씨는 문을 닫고 첫차로 어머니 모시고 아이들을 데리고 대구에 왔다. 아침을 같이 먹고 제사 준비를 할 수 있어 일찍 끝났다고 집사람은 좋아하였다. 방사선사로 병원에 근무하는 동생은 당직 때문에 설, 추석 당일 아침에 내려 왔다. 제수씨는 아이들에게 참 잘하여 주셨다. 대문에 들어 올 때보면 아이들이 양쪽 손을 잡고 들어 왔다. 일할 때도 아이들은 제수씨 옆에 붙어 있었고 잠을 잘 때도 옆에 누워 잤다.

일 년 후 임신이 되었을 때 동생과 제수씨는 많이 망설였다. 집사람과 친척들이 낳아서 키워야 의지할 곳이 있다고 많이 설득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어머니는 미장원에서 어린손자손녀 3남매를 돌보시며 행복해 하셨다. 어머니와 제수씨는 시어른을 극진히 모신 효부였고, 전처소생들을 차별 없이 잘 키워 주신 천사였다. 딸은 대학졸업 후 취직하여 결혼하였고, 큰아들은 대학졸업 후 방사선사가 되어 전문병원에 근무하고, 막내는 성균관 대학교 전면장학생이다.

어머니는 항상 젊었을 때 들일을 많이 하여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2013년 가을부터 치매증세가 약하게 오면서 어머니는 혼자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셨다. 이때부터 2층 어머니 방에 가실 수가 없어 미용실에 딸린 조그마한 방에서 제수씨와 같이 생활하셨다.

그때 추석부터 어머니와 제수씨는 못 오고 동생이 애들을 데리고 왔다. 어머니는 저녁에는 온 몸이 아파서 괴로워하시며 잠을 못 주무셨다. 동생이 여러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수소문 한 결과 고령 약국의 약을 복용하면 아픈 증세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부탁을 하여 내가 처방을 받아 보내드렸는데,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하시고 잠을 잘 주무셨단다. 효과가 있다고 경남, 부산, 서울, 대전, 전국에서 찾아왔으나, 영업정지도 어려 번 받았다.

누워계시다가 미용실에 나오고 싶다하시면, 일손을 놓고 휠체어에 태워드리고 앞으로 넘어지지 않게 끈을 매어드렸다. 눕고 싶다하시면 방에 눕혀드렸다. 경미하든 치매 증세는 갈수록 심하여 졌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세끼 밥을 먹여드리고, 시간 맞추어 약을 드리고 간식도 드렸다. 어머니 옆에 자면서 정성으로 모셨다. 단골손님들은 힘들게 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보며

“미장원 일도 힘든데 요양병원에 보내세요.”

“아니에요. 어머니는 내가 모십니다.”

제수씨는 반대를 하였다. 여동생들도 요양병원 이야기를 꺼냈는데, 어머니가 요양병원 가는 것 싫어하신다고 말을 막았다. 동생과 제수씨는 매일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고생을 하지만, 우리는 겨우 한 달에 한번 정도 어머니를 뵈러 갔고, 약은 보내드렸다. 급성폐렴이 와서 병원 응급실에 입원을 하셨다가, 퇴원하여 집에서 식사를 하시다 기도로 음식물이 넘어가 다시 입원을 하면서 코 줄을 꼽고 식사를 하셨다.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동생이 퇴근하면 미장원 일을 마친 제수씨와 같이 매일 저녁 요양병원에 출근을 하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하셨다. 우리가 병원에 갔을 때도 “집에 가자”고 하셨다. 제수씨가 “어머니, 여기 계시며 치료 받고 다 나으면 그때 집에 가요.” 어머니를 달래면 환하게 웃으셨고, 볼을 부비며 “어머니 사랑해요.” 하면 “하” “하” 소리 내어 웃으셨다. 요양병원에서 제수씨와 동생은 효부 효자로 이름이 났다.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나 가고 싶다던 집에는 끝내 못가시고 2년여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폐렴으로 2017년 11월 26일 한 많은 삶을 마감 하셨다.

장례식장으로 가서 동생들과 만나 장례준비에 대하여 상조회사 직원과 같이 협의를 하였는데 밤 12시가 넘었다. 삼일장을 하려니 날짜는 오늘 하루뿐이다.

08시에 영정 사진이 걸린 빈소가 설치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실감케 하였다. 염습을 하면서 편안하신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뵈오니, 좋은 곳에 가셔서 스물아홉에 일찍 헤어진 아버지와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만나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빈소에 조문객이 이어지고 저녁이 되니 많은 분들이 오셔서 자리가 꽉 찼다.

이튿날 화장장에서 육신으로 마지막 이별이이라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를 외치며 울부짖는 곡성이 울러 퍼졌다. 옆 호실에도, 또 옆에 호실에도 이별의 통곡은 이어진다.

오후에 고향 장지에 도착하였다. 가족장 조성 지역에 암반이 있어 돌을 깨어 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저히 하관을 할 수가 없어 임시 안장을 하고 내일 하관하기로 하였다. 버스를 타고 다 가고 우리 사남매는 고향 집으로 왔다.

몇 년 전부터 동생과 나는 가족묘를 만들어 흩어져있는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산소를 한곳에 모시기로 계획을 세웠다. 일주일 전 묘사 때 동생과 같이 가족묘 공사 사장과 만나 장소 결정 하였으나, 미리 준비를 못 한 상태라 바쁘고, 공사비걱정도 되었다.

어머니 장례 경비를 결산을 하니 돈이 남았다며 제수씨와 동생이

“남은 돈은 가족묘 조성 대금으로 쓰세요.”

“그렇게 사용해도 되겠어요?”

“네, 오빠 그렇게 해요.” 쾌히 승낙을 하였다.

“고마워, 남은 어머니 돈으로 산소 일을 잘 마무리 할게”

이때 제수씨가 동생한테 눈짓을 하였다. 어머니 생전에 모은 돈이 있다고 통장을 내놓았다.

“어머니 모시느라 고생했는데 네가 가져도 돼.”

내가 말을 하였으나, 제수씨가

“생신 때, 설 추석 명절 때, 병원에 계실 때 주신 돈을 저금한 돈이라 같이 나누어야 된다.”

주장을 하였다. 집사람 여동생들이 아무리 말을 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제수씨와 동생을 설득할 수가 없어 똑같이 나누기로 결론이 났다. 어머니 통장의 돈을 찾을 수 있는 서류를 준비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한 달 후 어머니 돈이 사남매 통장에 들어왔다.

장례가 끝나고 돈 때문에 형제간에 다툼과 주먹질까지 난무하는 사례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착하고 훌륭한 제수씨와 동생이 있다니 흐뭇하였다.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로 충효사상이 실종되어가는 요즘, 어머니와 제수씨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사입니다. 제수씨와 동생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이튿날 가족묘지터 제일 높은 곳의 중앙에 땅을 파고 증조부모님 하관을 하고 전 가족이 흙을 시토를 하였다. 포클레인으로 흙을 넣고 다졌다. 둘레 석을 놓고 작은 봉분을 만들고 오른쪽에 비석을 세웠다. 한 단 밑에 조부모님 묘 터를 파고 하관을 하고 봉분 없이 비석을 세우고, 한단 밑에 아버지와 두 분 어머니 모실 터를 파고 하관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삼 일째 오전에 산소에 올라가서 비석을 세워둔 산소에 삼우제를 올렸다. 잠시 후 하단 중앙에 큰 제단을 놓고 주과포를 차려 증조부모님께, 조부모님께, 아버지와 두 분 어머니께 제를 올리면서 어머니 상례는 끝이 났다.

※ 정영욱씨(제수씨)는 2015년 대전 동구청장 효부 상을 받았고, 2019년 2월 20일 기계유씨 대종회에서 효부 상을 받았다.

2019-07-22 15:24:42
221.166.237.14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규섭 2019-07-24 18:58:03
가슴 징한 글 잘 읽었습니다
부디 마음 잘 추스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