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산 - 호국 보훈의 달에
icon 이화진 기자
icon 2019-06-08 09:52:44  |  icon 조회: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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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산

 

 한 낮의 더위는 그늘을 찾게한다. 녹음 짙은 산은 더위를 피하려는 이들을 유혹한다. 도시 가까이에 울창한 숲을 가진 산의 등산길엔 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꼭 그런 산이 아니라도 오르고 싶겠지만 유달리 찾고 싶은 산이 있다면 遊鶴山이다.

 이 산은 코흘리개 동무들 모여 진달래 한 움큼 꺾고 할미꽃 붉은 입술을 만지며 놀다 떼굴떼굴 구를 수 있는 산은 아니다. 고향 마을 앞 가까이 있는 산이지만 경사가 급하여 어릴 적엔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해마다 이 무렵쯤 산을 찾고 싶은 까닭은 푸른 숲이 울창하여서도 아니며, 고향을 마주한 산이기 때문도 아니다. 전쟁의 아픔을 지니고 있어서다.

 유학산을 비롯한 주변 일대의 전투를 다부원(동)전투라고도 부르는데 유학산이 그 중심이었다. 彼我간 싸움이 치열했을 무렵 나의 잉태는 그려지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고향에 다녀오기 위해 그 산이 보이는 구안국도를 지나칠 적이면 처참했던 戰場의 상상화를 그려왔다.

 1950년 8월, 이산을 두고 무려 아홉 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만큼 격렬한 血戰이 벌어졌다. 837고지는 대구 사수의 요충지였으며 328고지를 두고서 무려 15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아군과 적군 간 불을 뿜는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치렀던 전투에서 아군이 졌더라면 인민군은 쉽게 대구와 그 이남을 점령하였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전쟁 중 가장 치열하고 끔찍한 전투로 아군과 적군을 합한 희생자 수가 가장 많았던 산! 빗발처럼 쏟아졌던 총탄과 하늘도 놀랄 만큼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던 수류탄 파편들. 초록 짙은 골짜기에 피 솟는 몸 휘청거리며 절규하던 장병들. 轟音(굉음)과 함께 화염을 뿜으며 내 쏟았던 박격포의 포격으로 산 짐승들도 그 얼마나 놀랐으랴! 새들의 보금자리와 흙 속에 지어진 개미집마저 그 어느 한 곳이라도 성한 데가 어디 있었으랴!

 실탄이 떨어지자 급기야 상호 백병전이 벌어졌다. 개머리판으로 치고받거나 날카로운 총검으로 찌르고 찔리며 벌였던 육박전으로 얼마나 많은 아군과 인민군이 죽어갔을까. 피어나 열매 맺을 이삼십 대에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장병들. 그들의 어머니는 평생 그들을 가슴에 묻고 지내느라 임종인들 어찌 편했으랴!

 산을 오를 적이면 장렬히 散花한 젊은 국군용사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더구나 공산세력으로부터 대한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머나먼 이국에서 온 미군 장병을 비롯한 연합국 장병들! 그들의 고통과 안타까운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이지 않을 수 없다.

 자주 만나는 다부동 출신의 한 팔순 노인에 의하면 전투에서 죽은 이들 중에는 열일곱 살 의 보국대원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로 보면 부모에게 어리광을 피울 나이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가 무참히 꺾어져야만 했을까?

 겹겹이 쌓여 있었던 주검을 껴 앉았던 산은 그 끔찍함에 얼마나 놀랐으랴! 그림자 없는 밤이면 휘휘하여 그 얼마나 몸을 떨었으랴. 신선을 태워 날아다니며 천년을 산다는 학이 노닐었다는 산의 이름이 무색하게 어찌 그리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단 말인가. 이제 그 처참했던 전투가 있은 지 70년이 다 되어간다. 전쟁의 傷痕을 가진 산도 인생으로 보면 노년기를 훨씬 넘긴 셈이다. 총성이 멈춘 후 오랜 세월 동안 산은 아픈 상처로 얼마나 신음했을까.

 아직 생존해 있는 백선엽 장군은 그날 치열했던 전투의 산증인이다. 오래 전 그는 중앙일보를 통해 ‘평화 시에 항상 전쟁을 생각, 대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유학산 전투를 회고하면서 강조하였다. 자신이 물러서면 ‘부하로부터 자신을 쏴라’고 할 만큼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하여 고지를 지켜낸 그의 말은 백번 지당하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거나 그 참상을 전혀 들은 바 없는 이들이라면 더욱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니겠는가.

 유학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기에 대구와 그 이남은 온전했다. 그 산과 용감히 싸운 용사가 있었기에 국토의 일부가 건재했다. 그러기에 용사의 혼이 서린 ‘호국의 聖山’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젠 그 전투가 벌어졌을 무렵 생존하였던 많은 이들이 이승을 떠났다. 금후 10~15년이 지나면 당시의 전투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거의 유명을 달리할 것이다. 생존해 있는 칠십대 이상의 세대는 후세에게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알려 평화의 소중함과 자유의 가치를 일깨워야 하리라. 평화가 어찌 공짜로 주어지는 걸까. 힘을 기르지 않는 나라의 지도자가 입버릇처럼 외치는 평화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

 

 

 

 

 

 

 

2019-06-08 09: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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