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수필] 할머니의 은혜

2023-04-29     유병길 기자

생후 6개월 된 손녀가 우리 집에 왔다. 손녀와 생활하면서 어릴 때 나를 키우며 고생하신 할머니의 은혜를 되새겨 본다. 배가 부르면 방긋방긋 웃고 잘 놀지만, 배가 고프거나 조금이라도 더우면 “앙” 한다. 뭔가 불편하면 짜증을 내는 것 같다. 나도 그랬을까?

낮에는 쿨쿨 자고 밤에는 놀려는 손녀, 꼬박 밤을 새웠다. 우유를 잘 먹지 않아 힘들었다. 보리차는 잘 먹는데, 우유는 왜 싫어할까. 전복, 야채, 쇠고기로 죽을 끓여 떠먹이면 오물오물하며 삼키고 입맛도 다시는 것 같다. 나는 잘 먹지 않아 할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모유를 먹지 않아서 그런지 주말에 오는 엄마 아빠를 보는 둥 마는 둥 한다고 아들 내외가 서운해한다.

나는 광복되던 해 유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첫 손자가 태어난 우리 집과 외가는 경사가 났다. 좋았던 일도 잠시뿐 생후 5개월 되었을 때, 장티푸스가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아버지가 앓아눕게 되자 어머니가 간호하였다. 아버지가 한고비를 넘기고 회복 단계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다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악화하여 생후 6개월 된 아기 혼자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정신을 잃고 헛소리하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찾으면 친정에 보냈다는 거짓말로 장례를 마쳤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 키우는 일에 전념하셨다. 그때는 분유가 없어서 쌀을 물에 불리고 갈아서 암죽을 끓여 작은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그래도 울 때는 동냥젖을 얻어 먹였다. 잠잘 때는 할머니 빈 젖을 물렸는데, 5일째 되던 날 “꼴깍” “꼴깍” 넘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서 호롱불을 켜고 젖꼭지를 눌렸을 때 묽은 젖이 나와서 기뻐하셨다고 한다.

한 달 후 상주 농잠 학교에 다니던 동네 형님이 축산과의 젖소가 송아지를 낳자, 사정하여 이틀에 우유 한 병씩을 사 와서, 죽과 같이 먹으며 자랐다. 돌이 지나고 밥을 먹게 되자 동네 큰일이 있는 집이나, 진 외갓집 등 할머니가 가셔야 할 곳은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음식은 다 먹여주셨다. 어미 없는 손자를 키우며, 울 때는 같이 울고, 재롱을 떨며 웃을 때는 같이 웃으신 그때의 할머니 심정을 손녀를 보며 알 것 같다. 두 돌 무렵에 아버지가 재혼하시고 어머니가 집에 오시던 날, 옆에 분들이 “네 엄마야” 하자 내가 가서 안겼다. 비로소 어머니 품을 찾은 나를 보며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손녀와 같이 생활하면서, “앙~”한마디에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려고 애쓴다. 할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며, 살아계실 때 내가 받은 만큼 보답하여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만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