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

2022-07-14     권정숙 기자
다음에서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시선[2012년 지식을 만드는 지식]

 

고정희 시인은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다. 19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고 1991년 지리산 등반 중 향연 43세 젊은 나이로 그만 실족사하고 말았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사람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위로의 시를 많이 남겼다.

그는 기독교적 사상으로 무장된 페미니스트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약자에 대한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가 군데군데 드러난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란 이 詩도 제목부터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연민과 응원으로 느껴진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린다고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하늘 아래 태어난 모든 생명은 존귀하며 자기 몫은 다할 수 있다고 노래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뿌리 깊으면 밑동이 잘릴지라도 새순이 돋는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근사한 위로이며 응원인가. 그러니 충분히 흔들리면서 과감하게 고통과 맞서자고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지 아니한가.

두 번째 연에서도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도 물 고이면 꽃은 핀다.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등불은 켜지듯 도처에 희망의 끈이 늘려 있으니 고통을 두려워 말고 과감히 맞서자고한다. 나아가서 당당히 살 맞대고 가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다. 2연 마지막 두 행이 절창이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그렇다 우리가 외롭기를 작정하고 목숨까지 걸면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무엇이며 못 할 일이 있을까.

사람은 더불어 산다지만 어차피 혼자다. 혼자 태어나고 갈 때 역시 혼자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과 인연을 만들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절망하면서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결국은 모든 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혼자라고 너무 외로워하지도 말고 시간이 늦었다고 포기도 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고 있다.

시간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우리의 잣대로 시간을 재지 말아야 한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지 아니한가. 마지막까지 절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힌다. 영원한 눈물도 없고 영원한 비탄도 없다니 참고 견뎌 볼 일이다. 또한 어떤 어둠속에서도 나를 향해 마주 잡을 손 하나가 오고 있다고 해주니 이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한가. 그 손은 세상속의 변화무상하고 야박한 손은 결코 아닐 것이다. 미쁘신 절대자의 손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