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당익장 문인을 찾아서, 이석병 시인

노당익장 이석병 시인을 찾아서

2022-04-20     방종현 기자

 

대구문인협회

볕 좋은 어느 봄날 북구 침산동에 있는 오봉산을 찾았다. 오봉산은 산봉우리가 다섯이라 오봉산이라 부른다. 진달래와 산벚꽃이 때맞춰 흐들어지게 피고 산새소리에 발걸음도 가볍게 산에 올랐다. 오봉산 제2봉 시계탑 광장에 시판(詩板)이 여럿 있다. 김춘수 시인, 김남조 시인, 유치환 시인 등.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한 분들이다. 그분들 詩와 어깨를 나란히 서 있는 이석병 시인의 詩 「오봉산」이 거기 서 있다. 이 시인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해오다가 여든이 될 즈음에 등단하여 현재까지 왕성하게 문학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노익장이다. 현재 대구 문인협회 부회장으로 문단에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는 현역이다. 이 시인은 오봉 새마을 금고 이사장으로 4선을 연임하고 2년 전 퇴임한 50년을 금융인으로 살아왔다.

대구문협

 

♦ 이석병 시인 출생지

경북 포항시 흥해읍 덕장리에서 대대로 살아오다가 조부모님 때 포항시 죽도동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1939년 9월 6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4대 12식구가 한 지붕 밑에서 살았습니다.

♦ 유년 시절과 초등학교 시절

시대적 환경이 모든 게 부족한 때였고 태평양 전쟁을 겪느라 먹는 것 보다 굶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보니 성장발육이 떨어졌지요. 포항 여흥 초등에 입학했지만 맨 앞자리가 내 자리였습니다. 6, 25동란을 겪으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 곡강초등학교로 4학년 말에 전학을 와서 전교 1등을 하면서 5학년 때 전교 회장을 했습니다. 꼬마가 전교 회장이라고 덩치 큰 학우들 놀림에 울고 있으면 누나 같은 여학생들이 마치 동생에게 하듯 어깨를 다독이며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습니다. 가정이 어려워 도시락도 못 싸고 가면 부회장이던 친구가 나누어 먹자고 해서 몇 번을 먹었는데 오후 시간에는 둘 다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그 후 친구에게 미안해서 점심시간만 되면 들판으로 피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담임 선생님이 도시락 2개를 싸 오셔서 숙직실에서 함께 먹기도 하였습니다. 졸업 무렵 때 하는 사은회 때는 쌀 1홉을 못 내서 참석도 못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졸업식 때는 우등상. 면장상, 1년 개근, 3년 정근상 등을 가슴에 안았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당시는 국가고시로 입학시험을 쳤는데 3등으로 흥해중학교에 합격이 되었습니다 당시 흥해중학교는 장학제도가 없어서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마을에 있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3년이 될 무렵 훈장님께서 아버지를 불러서 “한문은 이 정도면 남에게 속을 일 없으니 현대교육을 받도록 해라”는 권유로, 그해 다시 흥해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면 농사꾼이 되겠다고 약속을 한 후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중학교 얘기만 나오면 눈물이 맺히고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 없습니다. 3km나 되는 자갈길을 걸어서 왕복하면서 영어 단어장을 만들어서 예습으로 모두 외웠습니다. 학교 갔다 오면 책가방은 던져놓고 들판으로 나갔고 저녁에는 호롱불 켜고 공부하면 석윳값 든다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최익근 교장 선생님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가정형편을 아는데 아버지께 조를 수도 없어 난감해하다가 교장 선생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역시 중학교 때와 같이 진학 포기하고 시험만 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도 시험만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입시 준비를 눈, 코 뜰 새 없이 했습니다. 실업계인 포항 동지 상업고등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시험발표일도 일하다 오후에 늦게 가서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특대생(장학생)으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이미 진학은 하지 않기로 아버지와 약속이 된 상태 아닌가. 포항에 거주하시든 막내 숙부님께 말씀드려 숙부님께서 당신의 형님을 설득하셨습니다. 남들은 돈 들여 공부시키는데 장학생으로 돈 들 일 없고 아이가 먹는 식량만 주면 숙부님이 책임지겠다고 해서 겨우 승낙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때 그 기분은 하늘을 막 날 것처럼 감격했습니다.

♦사회진출

군 복무를 육군 제7사단 의무보급과에서 의무부사관으로 만기 전역하고 마을 이장에 피선이 되었습니다. 사회진출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시련에 부닥쳤습니다. 마을 회의에서 동 제당을 짓기로 결정되어서 마을 숲에서 30년생 소나무 4그루를 무허가로 벌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는 산감독, 술 감독이 제일 겁날 만큼 무서울 때였습니다. 시골 장날 장꾼이 신고해서 적발이 되었습니다. 관할 지서를 거쳐 포항 경찰서로 소환 되어 갖은 곤욕을 치르면서 사회생활의 신고식을 톡톡히 했습니다. 이장을 2년 정도 하다가 막냇삼촌의 도움으로 포항 버스회사 경리사원으로 취직되어 가솔(家率)과 함께 포항으로 갔습니다. 박봉에 애들과 살기 힘들다고 삼촌께서 옥수수튀기는 기계를 구입해 주시면서 생활비에 보태라고 하셨습니다. 출근 전과 퇴근 후는 검정 숯덩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2년쯤에 이웃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재건국민운동(새마을금고 전신)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하는데 한번 해 보겠느냐고 하기에 계몽이란 말에 뜻이 있어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50년 동안을 외길만 걷게 한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새마을금고 근무 얘기

1968년 11월에 재건국민운동 포항시, 영일 군지역 6개 읍면을 담당해서 계몽 운동했습니다. 절미 저축으로 가난을 탈피하고 잘살아 보자면서 농민들을 계몽하고 다녔습니다. 그 후 3년여 만인 1972년 9월에 인사발령으로 칠곡군지부 사무국장으로 전근이 되었습니다. 왜관에 도착하자마자 10월 유신이 되어서 8개 읍면 182개 이를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생판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우여곡절과 힘든 생활이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큰아이가 대구공고에 진학하면서 1978년에 칠곡군지부를 그만두고 대구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후 1979년 7월에 대구 북구 침산동에 있는 오봉 새마을금고에 전무로 입사했습니다. 연합회 10년 오봉 금고 41년을 외길로만 걸어온 셈입니다. 거의 한평생이 가깝도록 50년이 넘는 세월을 서민금융에서만 몸담았습니다. 본점과 침산지점은 자체회관이고 동암로 지점은 임차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 언론사에서 “금융계의 청백리” “최장수 금융 맨”이라는 칭호도 붙여주었고 그로 인해 새마을금고 중앙회 대의원, 중앙회 예산심의위원과 대구 북구청 지방 보조금심의위원장, 민주 평화통일 북구 자문위원도 역임했고 행복 북구 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새마을금고 중앙회장은 물론이고 북구 구민상, 대구 모범시민상, 장관 표창, 대통령 표창을 받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새마을금고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협동과 청렴으로 베풀고 봉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 사회 봉사활동

소싯적 서당을 다닌 덕분에 관혼상제를 익혔기에 주민들에게 무료 주례, 축의금접수, 소, 대렴, 축 지방 발인 등을 꾸준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지역발전을 위해 마을 문화회관건립, 아파트 소방도로 확장, 도시재생사업, 상습 침수지역 방지공사 등과 경로당 무료 급식도 제공하면서 그 외에도 사소한 사업들을 주관적으로 참여하여 봉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동의 발전이 곧 새마을금고의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출간한 책 소개 부탁합니다

자서전: 다듬어지지 않은 들삐의 모습

산문집: 은행도 아닌--……, 잊혀 가는 시골의 모습, 맏이,

돌멩이의 별난 모음.

시집: 여정, 강은 흐르는데, 바람 불어 좋은 날, 달빛에 젖은 인생.

수필집: 마르지 않는 심천 등입니다.

오봉산

 

♦앞으로 계획은

현재 주어진 직책(한국 문인협회 회원, 대구 문인협회 부회장, 한맥 문학가협회 이사, 행복 북구문화재단 이사. 동구유림회) 회원으로 충실히 할 것이며 오봉새마을금고는 슬로건에 맞게 감사직을 열심히 하겠으며 진목경로당 회원으로서도 항상 협조와 베풂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퇴임 후 마련한 낙소방(樂少房)과 소담 한계실(素潭 汗憩室)에서 서예도 익히고 색소폰 연주를 즐기고 있습니다.

소담 한게실에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심신을 달래고 매일 만보(萬步)걷기로 건강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 시인을 다시 보니 모든것을 포용하는 큰 산맥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