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56) 전통 혼례 1

1970년대 중반까지 전통 혼례를 하였다.

2022-03-18     유병길 기자

195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와 상주지역에서 혼인은 신랑 신부 어른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친분이 있는 어른들이 "사돈 하자" 결정하면 무조건 따랐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근지역(면)에서 대부분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에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매파가 신랑집과 신부집을 왕래하며 다리를 놓으면, 상대방의 가문을 파악한 어른들이 만나서 혼인을 결정하였다. 신랑과 신부는 상대방의 얼굴 한번 못 보고 어른들의 결정을 따라야 하였다.

혼사가 결정되면 한두 달 전부터 신부집은 하나하나 결혼식 준비를 하였다. 목화솜으로 짠 베를 재단을 하고 풀을 먹이고 다듬잇돌에 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솜을 놓아 시집에 가져갈 이불을 여러 채 만들고, 신부 신랑 한복도 여러 벌 만들었다.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 몰래 술을 담갔다. 술 조사의 단속이 심하였으나 양조장 술을 사다가 먹으려면 비싸서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결혼식 전날은 친척과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떡쌀을 쪄서 떡을 만들고 채소를 다듬고 마당 가에 솥뚜껑 여러 개를 뒤집어 삼발 위에 놓고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마른 솔가지로 불을 피우며 전을 부쳤고, 남자들이 돼지를 잡아주면 고기를 삶고 여러 가지 채소를 쓸고 돼지 피와 혼합하여 주전자에 담아 깨끗하게 씻은 창자에 넣어 솥에 쪄서 순대를 만들었다.

배고픈 아이들은 엄마를 따라왔고 엄마들은 전 한쪽을 슬쩍슬쩍 아이들을 주면 집에 가져가서 형제들과 나누어 먹었다. 전을 몰래 잘 주는 친구 어머니가 부러웠다. 동네에 큰일이 있으면 배고픈 어른이나 아이들은 행복한 날이었다. 결혼식 전날은 늦은 밤까지 바빴다.

결혼식 날 신랑이 신부집에 와서 혼례를 하였다. 마당 복판에 멍석 두 장을 깔고 초례청을 만들었다. 높은 다리가 달린 상을 놓고, 대추, 밤, 곶감, 쌀 사발을 가운데 놓았다. 대나무 가지를 꽂은 화병은 남쪽에, 소나무 가지를 꽂은 화병은 북쪽에 놓았다. 동쪽 서쪽 양쪽 중앙에는 술잔을 놓았고, 살아 있는 암탉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대나무 화병 옆에 수탉은 푸른 보자기에 싸서 소나무 화병 옆에 놓았고 북쪽에는 병풍을 쳤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이 초례상 동쪽에 서면,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고 원삼을 입고 머리에 큰비녀를 꽂고 족두리를 쓴 신부는 서쪽에 서서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신랑 신부는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진행자가

“북향재배” 신랑은 북쪽(임금님 계신 곳)을 향하여 절 두 번을 하였다.

“교배례” 신랑 신부는 옆에 준비된 세수대야 물에 손을 씻고 수건에 손을 닦았다. 신부가 양쪽에 선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신랑에게 두 번 절을 하면, 신랑은 답례로 한 번 절을 하였다.

“합근례(근배례)” 신랑 신부가 꿇어앉으면, 신랑 신부를 도와주는 도우미가 잔에 술을 따르고 초례상 밑으로 서로 술잔을 교환하여 신랑 신부에게 주었다. 신랑은 술을 마시고, 신부는 마시는 흉내만 냈다.

혼례식 구경꾼이 초례청을 둘러싸고 담장 밖에서도 많이 구경들 하였다. 혼례가 끝이 나면 신부는 작은방으로 가고 신랑은 사랑으로 갔다. 초례상 위의 보자기에 싼 암탉 수탉은 놓아주었다.

혼례식이 끝나면 하객들은 방이나 마당의 멍석에 앉아서 잔치국수와 술 고기를 마음껏 먹었다. 마당 한쪽에는 천막을 치고 큰솥에 장작불을 때면서 잔치국수를 끓여내고, 광이나 헛간에 과방을 차려놓고 준비한 음식을 목기나 쟁반에 담아냈다. 성씨마다 과방에서 음식을 잘 차려내는 사람이 있었다. 큰일이 있을 때마다 불려 다니며 일을 하였다. 과방에서 일하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한정된 음식을 여럿이 나누어 먹을 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었다. 굶주리다가 음식과 술을 많이 먹다 보니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았고,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축의금 대신 두부 몇 판, 메밀묵 도토리묵 몇 판, 떡 한 말 등 현물로 주고 받았다. 친구 집 밭둑에는 도토리 나무가있어 가을이면 매일 아침 주운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 선물을 하였다. 결혼식 전날이나 당일 일을 도와주는 것도 품앗이로 하였다. 먹을거리가 부족하여 굶주리던 시대 결혼식 날은 일가친척과 온 동민이 참석하는 잔치였고, 먼 곳에서 오신 친척들은 며칠씩 자고 먹고 갔다.

 

동네마다 혼인 계가 있었다. 신랑용 사모관대(단령, 사모, 각대, 목화)와 신부용 족두리, 큰비녀, 원삼 등은 동네 혼인 계에서 보관하면서 빌려주었다.

1960년대까지 전통 혼례 시에 빌려주고 쌀이나 돈을 받았고 매년 년 말에는 계추를 하였다. 70년대 이후 문화원,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전통 혼례가 줄어들었고, 80년대 이후에는 시골에서도 예식장 결혼식이 보편화되었고, 사모관대와 족두리 등은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