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벤야민의 ‘아우라’, 그 실체와 본질(Ⅰ)

‘아우라가 풍긴다’ 또는 ‘아우라를 내 뿜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는 주체와 대상이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황홀한 교감을 나누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아우라’를 맛본다

2022-02-25     장기성 기자
발터

가수 조영남(趙英男·77)이 쓴 자전적 회고록 『예스터데이』가 지난달 27일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됐다. 그는 전처(前妻)인 배우 윤여정(尹汝貞·75)과의 첫사랑과 이혼에 관해 소상히 밝히고 있어 팬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내 생에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는 이 책에서 윤여정을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직무유기이고 위선"이라며 윤여정과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는 윤여정을 서울 무교동 음악다방 '쎄시봉'에서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몸은 가냘프고 야리여리 했지만, 인상이 정말 좋았고 똑똑해 보였다"라며, "독특한 자기만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했다. 조영남은 바람을 피운 뒤 윤여정과 이혼을 하게 된 과정도 어쭙잖게 책에 옮겨 놨다. 그는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은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순전히 내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라며 "나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지랄발광을 쳤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 회고록을 읽으면서 눈에 띄는 대목은, 조영남이 본 윤여정의 첫인상이다. "독특한 자기만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표현인데, ‘아우라’라는 말을 대놓고 말하니 왠지 생경스럽게 들리기도 하다. ‘아우라(Aura)’가 뭐 길래 조영남은 그녀를 향해 이 말을 사용한 걸까?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아우라가 풍긴다’ 또는 ‘아우라를 내 뿜는다’등과 같은 말을 가끔씩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아우라’(Aura)라는 용어는 발터 벤야민(W.Benjamin: 1892-1940)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글에서 처음 언급된 이래로 세계적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전통적 예술작품’이 갖는 본질적 성격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술작품을 벗어나, 사람이나 사물에도 ‘아우라’를 투영시켜 사용하고 있다. 조영남의 회고록에서 윤여정에 사용된 아우라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사용은 벤야민의 본질적 개념적용과는 사뭇 다르다.

루벤스의

벤야민은 아우라적 경험이란 별자리를 보는 것처럼 “꿈꾸듯 먼 곳으로 빨려 드는 듯한 시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호과정 속에서 주체와 대상 모두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교감을 나누게 되는 순간이 바로 아우라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우라란 주체와 대상이 연결되는 일종의 특별한 주관적 경험이자 교감이다. 아우라를 지닌 예술작품의 수용은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고 침잠함으로써 주체와 대상이 교감하는 순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좀 어렵게 설명되었다. 아래를 보자.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동화소설 『플랜더스의 개』(1872)를 떠올려 보자.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의 조그만 마을에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라난 넬로는 어느 날 길에서 주인에게 맞아 죽어가는 개를 발견하고는 집으로 데려와 정성스럽게 돌봐준다. 넬로는 자신의 보살핌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개 파트라슈와 함께, 우유를 배달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간다. 넬로의 꿈은 화가(畫家)가 되는 것이다. 소년은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그린 그림을 어린이 그림대회에 출품하지만, 일등은 다른 아이에게 돌아가 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넬로는 미술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빠지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살집조차 없어진 넬로는, 늘 꿈에서 조차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을 보기 위해 안트베르펜의 성당으로 간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면 금화(金貨)를 내야 했기 때문에, 가난한 넬로는 지금껏 한 번도 그 그림을 볼 수 없었다. 때마침 성탄절 전야, 넬로와 파트라슈는 우연히 열려 있는 성당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그렇게 보고 싶었던 바로 그 그림을 보게 된다. 넬로가 차가운 성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림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열정적인 황홀감에 젖어, 그의 창백한 얼굴위로 눈물이 아롱져 흘러내렸다. “결국 내가 저 그림들을 보고야 말았어!” 넬로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신이시여, 이제 충분해요!” 다음날 아침, 크리스마스의 해가 떠올랐을 때 사람들은 성당 안에서 한 소년과 늙은 개 한 마리가, 서로 부둥켜안은 채 굶주림과 추위로 얼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 동화 「플랜더스의 개」 의 슬픈 결말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안트베르펜의 성당의 그림, 그러니까 넬로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고 결국 죽음에 직면해서야 보게 된 그림이 바로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P. Rubens)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성화(聖畫)다.

루벤스(P.Rubens)

당시 교회에서 종교적 수단으로 예술작품이 사용되는 경우, 작품이 주는 ‘감동의 극대화’하기 위해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작품을 감추어두곤 했다. 그런 작품들은 1년에 몇 번 아주 중요한 교회의식이 있는 날에만, 특별한 '제식(祭式)의 무대 배경'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공개되거나, 심지어 어떤 작품은 1년 내내 베일 속에 가려져 있기도 했다. 실제로 「플랜더스의 개」에서 넬로가 루벤스의 그림을 보았을 때의 감동과 황홀감은 현대인이 인터넷이나 지면을 통해서 혹은 실제의 루벤스 그림을 보았을 때 받게 되는 감동과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넬로의 경험은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밖에는 겪을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렇기에 오직 단 한곳에서만 볼 수 있는 미적(美的)체험이다. 그래서 넬로는 뜨거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깊은 황홀감을 맛본다. “신이시여, 이제는 충분해요” 라는 넬로의 말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비장함마저 감도는 영혼체험을 토로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넬로와 ‘루벤스의 그림’이 갖는 ‘아우라적 체험’이며, 주체와 대상 모두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교감을 나누게 되는 바로 순간이 ‘아우라’라는 것이다.

<현대는 누구나 인터넷에서 예술작품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복제된 작품이다. 복제된 작품(사진)에도 ‘아우라’가 존재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제2부>에서 다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