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아남은 사람들(Those Who Remained)'

전쟁이 지나간 폐허에는 고아들,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생사를 모르는가족과 힘겨운 그들 일상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영화는아내와 자식을 잃은 의사 '알도'와 홀로코스트에서 가족을 잃고 혼자 남은 열여섯 소녀 '클라라'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룬다. 비극적인 전쟁 속에서 사라져간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전쟁 속에서 상처받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섬세하고 따뜻하게 그려진다.

2021-12-09     강지윤 기자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Those Who Remained, 2019)’

 

이 영화는 헝가리의 젊은 감독 ‘바나바스 토드(Banabas Toth 1977~ )’감독이 2019년 만든 두 번째 장편영화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헝가리 부다페스트가 배경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많은 동유럽 국가들은 그 와중에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어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고 헝가리 역시 소련의 지배를 받는다. 전쟁이 지나간 폐허에는 고아들,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생사를 모르는 가족과 힘겨운 그들 일상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영화는 아내와 자식을 잃은 의사 알도와 홀로코스트에서 가족을 잃고 혼자 남은 열여섯 소녀 클라라의 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룬다. 비극적인 전쟁 속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전쟁 속에서 상처받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섬세하고 따뜻하게 그려진다.

부인과 병원. 알도는 새 생명을 받아낸다. 보일듯 말듯한 미소. 남편의 손을 잡으며 축하한다. 이번에는 16살 소녀를 데리고 노부인이 들어온다. 생리가 늦어서 데려왔다는 것이다. 영양상태나 특이점 등을 물은 뒤 6개월 후에 다시 들르라고 한다. 그는 이따금 유태인 고아들이 있는 보육원에 물품을 가지고 방문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다 웅크리고 잠들곤 한다.

퇴근이 가까운 시간. 누가 노크한다. 그 소녀다. 하교 후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생리가 시작됐다고 한다. 소녀는 알도의 집까지 따라온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나까지 사라지면 할머니가 편할 거라고 대답한다. 소녀를 집안으로 들인 그는 차를 끓인다. 선생님은 왜 살아요. 사는데 이유가 있나. 우린 더 힘들죠 떠난 사람보다. 소녀는 할머니가 감자를 어디서 사는지 버터와 설탕을 얼마나 아끼는지 비난한다. 알도는 할머니가 배급받아 사는 생활이 녹록지 않음을 안다. 부끄러운 줄 알라고 소녀를 쏘아보고 미안함에 소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는다. 소녀의 두 팔이 그를 감싼다. 가만히. 잠시... 천천히 차를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소녀는 아빠가 독일 의학 저널을 읽는걸 봤다고 한다. 아빠가 돌아가셨냐고 묻자 살아 있을 거라고. 아직 수용소에 있는 사람도 많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자 그녀가 묻는다. 주방에서처럼 날 안아줘도 되겠느냐고. 깨지기 쉬운 유리병을 만지듯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안는다. 소녀는 돌아와 엄마 아빠에게 편지를 쓴다. 그가 즐거움이라고는 모르는 사람 같아서 안쓰럽다고. 그리고 편지를 상자에 담아 소중히 보관한다.

 

벨 소리. 문밖에는 비를 맞은 채 클라라가 서 있다. 선생님과 포옹하는 걸 할머니가 봤대요. 할머니는 내가 불쌍해서 키우는거지 창녀를 키운 건 아니래요. 할머니랑 살기 싫어요. 물을 데우던 알도는 목욕을 하겠느냐고 묻는다. 소녀의 표정이 환해진다. 전에는 보일러가 있어 밤마다 목욕을 했었다고. 혼자 있기 두려운 게 왜 창녀죠? 알도는 할머니께 전화를 건다. 소녀는 따뜻한 물속에서 대여섯 살의 어린 자기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종교 있어요? 새 칫솔 써. 화났어요? 그냥. 반대편 침대에 누워있던 소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건너와 웅크린 알도의 침대 한켠에 모로 눕는다. 그가 일어나 담요를 가져와 덮어준다. 좁은 침대에 두 개의 칼날같이 누운 두사람. 혼자 있는걸 두려워한다고 창녀는 아니야. 나도 두려워. 알도가 말한다.

다음날 올기할머니가 찾아온다. 손녀를 찾으러 보육원에 갔다가 조카의 딸인 그 애를 데려왔다고. 제가 밝은 아버지는 못 되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거라고 알도는 말한다. 셋은 영화관에도 가고 함께 체스를 두기도 한다.

어느 날 할머니 집에 간 클라라가 몹시 아프다는 전화가 온다. 알도는 동료였던 친구에게 봐 달라고 연락을 한다. 오랫만에 만난 동료는 돌아온 알도와 인사를 나눈다.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동료는 자기도 7살 13살 두 명의 딸을 입양했노라 말한다. 클라라는 몇 살이지? 알도는 웃으며 답한다. 다섯 살과 일흔 살을 오가지.

클라라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독일어로 의학저널을 번역해 주고, 신문을 보며 한숨 쉬는 알도에게 책을 보라거나 낡은 가디건을 그만 입으라고 잔소리도 한다. 그녀가 화학의 분자식에 가족을 빚댄 질문에 하자 알도는 무너진다. 잃어버린 가족 생각 때문이다. 다음날 알도는 메시지를 남기고 출근한다. 오래된 서랍 속 앨범을 보라고. 그리고 아무 말도 말라고.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못 된다고. 초인종이 울리면 앨범을 제 자리에 넣어두고 문을 열어 달라고. 그들 가족의 단란함이 담긴 아내와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클라라는 비로소 그의 부서진 영혼을 이해한다.

그들은 입양한 두 딸이 있는 알도의 친구집을 방문한다. 존중받으며 한 가족이 된 두 아이와 클라라는 함께 어울린다. 9살때 강제로 수용소에 끌려간 큰 딸은 동생을 맞아 어린 시절을 되찾고, 두려움에 말문을 닫은 작은 딸도 많이 밝아졌다고 친구의 아내가 말한다. 클라라도 표정이 밝아진다.

 

전쟁이 끝나고 십대들은 댄스교실에서 춤을 배운다. 알도는 남녀 관계에 대한 책을 구해 읽어 보라고 내민다. 립스틱을 빨갛게 바르고 집을 나서는 그녀를 조심스레 내보낸다. 말조심 해야 한다고. 그 밤에 동료 의사가 집으로 찾아와 전화기의 도청장치를 뽑으며 얘기한다. 오늘 입당했어. 아버지가 공장주였으니. 클라라가 어떤 존재지? 당에서 전화가 와서 동료 3명에 대해 보고하라더군. 자네도 그중 하나야 그래서 왔어. 그즈음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 직원 얘기도 듣는다. 알도는 병원에서 진료한적이 있는 그의 환자와 카페에서 만나 데이트를 한다. 그리고 1945년에 사라진 그녀의 약혼자 얘기를 듣는다. 그는 작년에 생긴 수양딸 얘기를 그녀에게 한다.

댄스교실에서 만난 파트너와 데이트를 하지만 클라라는 재미가 없다. 그날밤 자동차가 문밖에서 멈추는 소리가 나고 문 두드리는 소리.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알도는 내가 끌려가면 내일 아침 첫차를 타고 할머니에게 가라고 클라라에게 말한다. 두려움과 공포속에 클라라는 그의 등을 감싸 안는다. 알도 역시 그녀를 안아 보지만 둘은 그저 눈으로만 대화를 나눈다. 긴장된 순간이 지나고 클라라는 이제 자기 침대로 돌아간다. 아침이 되어 알도가 클라라에게 말한다. 멋진 여잘 만났는데 여기로 초대했어. 그렇군요. 좋은 소식이네요. 오늘은 할머니 집에 갈거에요. 그녀는 짐을 챙겨 나간다. 할머니는 어른들 세계와 자신의 결혼생활 얘기를 들려준다. 죽어도 발디디기 싫어하던 보육원을 찾아간 클라라는 어린 고아들과 어울린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하고.

 

3년뒤. 알도의 아내와 올기할머니 병원의 오래된 간호사가 모여있고 식탁에는 조촐한 생일상이 차려져 있다. 퇴근하고 들어서는 알도를 화사한 표정의 클라라가 맞는다. 꽃다발을 들고 황급히 들어온 클라라의 남자친구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자 스탈린이 죽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올기 할머니의 생일을 맞아 모두 함께 축배를 든다. “이 자리에 없는 이들을 위해 건배하자!” 깊이를 알수 없는 알도의 맑은 눈에 물기가 비춰 보인다.

이제 숙녀가 된 클라라가 버스에 몸을 싣는다. 마치 그녀의 인생에 오르내린 많은 사람들처럼 승객이 타고 또 내린다. 한 정거장을 지나 또 다른 미지의 정거장을 향해 가는 표정이 담담하고 고요하다.

‘그들을 숨쉬게 한 건 오직 사랑이었다’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이 영화는 사랑의 치유력에 대한 이야기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수상한, 2020년 아카데미 장편부문 후보작 10편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2020년 헝가리 필름 아카데미 4개부문을 석권했다.

 

주연을 맡은 알도역의 ‘카롤리 하이두크(Karoli Hajduk)’의 연극으로 다져진 정적인 내면연기와 클라라역의 ‘아비겔 소크(Abigel Szoke)’가 보여준 부서진 영혼의 냉소적이고 질풍노도를 겪어내는 연기 앙상블이 영화가 지닌 고전적 품위와 감수성을 성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팬데믹의 거대한 파도 앞에 나뒹구는 우리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영화다, 남겨진 사람들이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어 가는 과정이 잔잔한 여운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