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

“왜 사람들은 죽도록 사랑할까?”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과 사랑만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2020-08-10     김영조 기자
지그문트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그의 저서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응집과 통일을 지향하는 삶에 대한 충동과 이와 정반대로 파괴와 해체를 지향하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삶과 사랑에 대한 충동 에너지가 에로스이고, 소멸과 죽음에 대한 충동 에너지가 타나토스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쾌락원칙이라 하였다. 쾌락은 정신 기관을 자극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고, 그 속에 있는 자극의 양을 일정한 수준이나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때 느낄 수 있다.

사랑의 행위(성행위)를 예로 들면, 이때 일어나는 에너지의 강화와 집중 상태인 극도의 흥분은 결국 흥분이 소멸된 상태 즉 무()를 위한 것이다. ()로 돌아가는 무화(無化)의 결과가 쾌락이며 그것이 곧 죽음이다. 따라서 사랑의 쾌락은 죽음을 향한 충동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수컷 거미는 교미를 한 뒤 암컷에게 잡아먹힌다. 수컷 거미는 현재의 삶과 사랑에 대한 충동을 가지면서 죽음에 대한 충동도 느낀다. 사랑의 배후에는 모든 긴장과 집중된 에너지의 소멸을 갈망하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과 죽음의 공존을 표현한 문학작품으로는 오르페우스(Orpheus)와 에우리디케(Eurydice), 아프로디테(Aphrodite)와 아도니스(Adonis), 햄릿(Hamlet)과 오필리어(Ophelia), 로미오(Romeo)와 줄리엣(Juliet) 등이 있다.

특히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음으로 대신한 사례로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이야기이다. 콘월(Cornwall) 왕국의 왕자 트리스탄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왕이 된 백부 마르크 밑에서 젊은 기사로 성장한 트리스탄은 마르크의 신부가 될 아일랜드의 공주 이졸데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 해상에서 시녀의 실수로 사랑의 미약(媚藥)을 마시게 되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연인관계로 되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이졸데는 트리스탄과 밀회를 나누었으나 어느 날 둘 사이의 관계가 발각되고 두 사람은 깊은 숲 속으로 도망쳤다. 그 후 왕의 용서로 이졸데는 궁정으로 돌아오고 트리스탄은 추방되었다. 이졸데를 잊지 못하고 병상에 눕게 된 트리스탄은 사자(使者)를 보내 그녀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직후에 도착한 이졸데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트리스탄을 포옹한 채 죽고 말았다.

아메데오

 

다음은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와 잔 애뷔테른(Jeanne Hébuterne)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14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만나 결혼하고 어린 딸까지 낳았다. 그러나 35세의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먼저 사망하자 다음 날 21세의 잔도 임신한 몸으로 자신의 집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택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창작연대 미상(未詳)의 고대가요 중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란 것이 있다. 흰 머리를 풀어헤친 어떤 미친 사람(백수광부; 白首狂夫)이 술병을 들고 어지럽게 강을 건너가는 것을 아내가 쫓아가며 말렸으나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은 남자는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에 아내도 공후(箜篌)라는 악기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부른 뒤 바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1926년 일본 유학 중이던 극작가 김우진과 ()의 찬미를 부른 성악가 윤심덕이 사랑을 못 이겨 현해탄 바다에 뛰어들어 동반자살을 택하였다. 유부남과 노처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죽음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삶을 가장 사랑하였으면서도 죽음으로 삶과 사랑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이어가기를 희망하며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 즉 죽음이고, 가잘 불확실한 것은 죽음 뒤의 모습 즉 영혼이 있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 주인공은 죽음에 초연하고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사람들이자 영혼불멸설을 믿는 주인공들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범죄나 부도덕한 행위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삶을 가장 사랑한 것도 아니고 죽음으로 삶과 사랑을 이어가기를 희망한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죽음을 택한 것뿐이다. 진정한 삶과 사랑만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