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의 금강산, 화왕산 관룡산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관룡사(觀龍寺)

수려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일품인 관룡산 중턱에 위치 신라시대 8대 명찰로 보물 6점, 지방문화재 5점 보유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구룡산 병풍바위 비경 조망 경남의 또 다른 경주라 불리우는 창녕의 불교예술 역사박물관

2020-06-26     장희자 기자

관룡사(觀龍寺)는 경남 창녕군에서 동쪽으로 이십리 떨어진 옥천리 소재 관룡산 중턱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태백산맥이 영남으로 흘러 팔공산과 비슬산을 만든 다음 낙동강과 나란히 달리면서 다시 크게 솟구친 산이 바로 화왕산줄기이다.  관룡산은 화왕산의 동쪽으로 이어진 산봉우리로 수려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일품이여서 창녕의 금강산으로도 불린다. 이런 비경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사찰이  관룡사이다.

절의 명칭 ‘관룡’은 증법국사가 사찰을 지을때 화왕산 정상의 월영삼지(月影三池)에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것을 보고 지었다는 설과, 삼국통일 이후 원효대사가 제자인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리는 중,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이 때문에 관룡사 뒷산 왼편은 관룡산, 오른편은 구룡산으로 불리고 있다.

절의 창건에 대해서도 두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약사전의 묵적(墨蹟)인 ‘영화오년기유(永和五年己酉’에 따라 349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대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5년(528)보다 앞서는 것으로 신빙성이 의문시 된다.

둘째 「창녕군지」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5년(583)에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초창했다는 설이다.

이때 관룡사는 신라의 8대 종찰의 하나로 원효대사가 제자 천여 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도량이였다고 한다.

비록 관룡사의 정확한 초창연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고찰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에 고려시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다만 현재 관룡사 경내에 있는 부도(경남 문화재자료 제19호), 약사전내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과 석조(石槽) 등은 고려시대 유물로서 고려시대에도 사찰이 잘 경영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1965년에 발견된 ‘대웅전상량문’에서 초창(1401), ‘약사전 상량문’에서 약사전 재창(1507)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시대 창건이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초에 사찰의 재건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임진왜란의 피해를 입어 불전, 승사 등이 불에 타버리고 유일하게 약사전만 남아있다.

그후 1733년에 발간된 관룡사 사적기에 ‘조선 숙종 30년(1704) 가을에 큰비가 내려 금당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0여 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뒤 숙종 38년(1712)에 대웅전 등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영조 25년(1749)에 기존 전각을 중창했다

20세기에는 6.25전쟁 때 관룡사 일대가 북한군의 집결소가 되어 폭격으로 팔상전이 전소하고  대웅전 일부도 파괴되어 1956년 보수하였다.

1963년에는 대웅전을 보물 제212호로 지정헸다.    1965년 7월에는 해체보수 및 단청을 하였다.

1968년 요사채를 이건, 1978년 대웅전 번와보수, 1988년 부식재교체 및 번와보수를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신라 8대 명찰이라는 명성답게 보물과 문화재가 즐비하여 약사전(보물 제 146호), 약사전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 대웅전(보물 제212호), 대웅전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보물 제1730호), 관음보살벽화(보물 제1816호),  용선대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95호), 약사전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제 제11호), 관룡사 사적기(경남 유형문화제 제183호), 관룡사 석장승(경남 민속문화제 제6호), 관룡사 원음각(경남 문화재자료 제140호), 관룡사 부도(경남 문화재자료 제19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