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서 만나는 한산대첩길과 한산도대첩!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고 가는 봄이 아쉬운 듯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 율포해전(栗浦海戰)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왜구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고 감탄한다. 새파란 등짝에 동그란 눈의 동박새가 포르르 난다.

2020-04-28     이원선 기자
윈드서핑이

‘통영(統營)’이란 지명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따왔다. 통제영(統制營)은 1593년(선조26)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란 직제를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이를 겸하게 한 데서 비롯한다.

통영은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바다에는 온갖 양식장이 줄지었다. 해안선 또한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지고 구부러진 모습이 볼 만하다. 갈매기가 날고 짭쪼름한 소금 냄새가 코를 톡 쏘는 통영항 주위로는 충무김밥집이 즐비하고 잔잔한 파도의 노래가 거친 가슴을 엄마의 손으로 쓸어내리는 듯 편안한 곳이기도 하다. 요트가 지친 날개를 접어 숨을 고르고 윈드서핑이 기지개를 펴는 해안선을 따라 천연덕스럽게 늘어진 산책로가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일명 한산대첩길이다.

그 중 제5코스인 삼칭이길을 걷기로 했다. 출발은 마리나리조트, 등대낚시공원을 거쳐 해바라기전망대에서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고 가는 봄이 아쉬운 듯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다소 완화된 가운데 처음 맞는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얼굴 위로 상기된 표정이 엿보인다.

가족단위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간혹 아베크족도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전동킥보드를 타고,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는 자전거형 탈것의 페달을 밟는 모습들이 마냥 행복해 보인다. 방파제를 끼고 줄지어 늘어서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오전이라 그런지 살림망이 텅텅 빈 것도 있고 어린참돔이나 보리멸이 헤엄치는 것도 있다. 벌써 꽤나 잡았는지 회를 뜨는 모습에서는 절로 군침이 돈다.

해바라기전망대에서

편안하게 늘어진 길을 쓸어가는 해풍이 옷자락부채를 만들어 시원하다. 바다 속으로는 해산물이나 어류를 키우는 양식장을 알리는 부표들이 점점이 떠서 하얗게 줄지었다. 등대낚시공원을 못 미쳐 소금냄새가 유난히 찌들고 길 가장자리로 밧줄 꾸러미가 무더기를 이루어 웅크렸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이기도 했지만 의문은 이내 풀렸다. 언젠가 방송을 통해서 본 우렁쉥이(멍게)양식장인 것이다. 빨간색 우렁쉥이무리가 포도송이처럼 밧줄에 다닥다닥 붙어 올라오는 모습이 홍도화가 활짝 핀 것 같다.

평화롭기만 한 봄 바다, 봄소식을 실어 나르는 유람선이 하얗게 꼬리를 물고 윈드서핑이 순풍에 낙엽이 되어 유유자적이다. 연신 바다 위를 오가는 배가 한 폭의 그림 같은 평화로운 바다, 옛날 이곳이 저 악랄하고 지독한 왜구들을 맞아 누란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선조들의 숭고한 선혈이 뿌려졌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1592년 4월 부산진을 침범한 왜구는 거칠 것이 없었다. 부산에서 한양까지는 괴나리봇짐을 지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약 1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그 길을 크고 작은 전투 중에도 20여일을 못 채워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왜구의 진격을 두고 혀를 내 두름은 물론 ‘파죽지세’라 말한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납고 험악했는지 선조임금은 밤을 기해 몽진, 불타는 도성을 뒤로 황급하게 의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 여세를 몰아 왜구들은 조선의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을 노리고 나선 것이다. 호남의 곡창지대는 군량미 걱정을 덜기에 반드시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은 삼면이 바다인 조선과는 달리 사면이 바다인 섬나라다. 약탈을 전문으로 하는 해적 또한 득세했다. 풍신수길은 이러한 세력까지 몽땅 포용하여 해전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따라서 출전만 했다하면 곧장 승리라는 공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풍신수길은 조선 최대 곡창지대를 손아귀에 넣는다면 남는 곡식은 본토로 들어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리라는 계획 하에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꿈은 역시 꿈이었다. 풍신수길의 그 원대한 꿈을 한순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으로 승리로 이끈 해전이 바로 한산도대첩인 것이다.

낚시꾼의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선조25) 7월8일 해적이나 다름없는 와키자카(脇坂安治)의 정예 병력이 이끄는 73척과 구키(九鬼嘉隆)가 거느린 42척과 이순신이 이끄는 56척이 이곳 통영 앞바다에서 격돌한 해전이다. 당시 이순신의 수군은 6월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 율포해전(栗浦海戰)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왜구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하지만 왜구들은 패전이라는 멍에로 인해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이에 그동안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하는 등 절치부심, 분발하고 있었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마침내 왜구들은 자만심에 젖었는지 그물망 안으로 들어왔다. 통영과 화도, 미륵도, 대죽도 거제도 등에 둘러싸이고 보니 독 안의 쥐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한산도에서 출발한 조선수군은 학익진을 펼쳐 왜구들을 에워 싸 버린다. 거북선이 불을 뿜고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승자총통(勝字銃筒)의 포열이 벌겋게 달도록 집중 포화다. 모든 화력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적선으로 향하자 지리멸렬, 격파되고 불탄 적선이 66척, 목이 잘린 수급이 86급(級),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왜병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른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의 왜군은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한다. 이 전투로 조선은 서서히 승기를 잡아갔고 풍신수길은 밤잠을 못 이루는 가운데 전쟁의 새판을 짜기에 골치를 썩이다 전쟁 중 홀연 사망한다. 결국 1598년에 이르러 조선의 승리로 끝난다.

외국의 역사가 헐버트(Hulbert, H. 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한다. 임진왜란 3대 대첩(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대첩)으로 기록되는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된다.

봄바다의

해바라기전망대에 올라 봄 바다의 비경에 취해 한참을 머물다가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자드락길을 택했다. 잡목이 우거진 탓에 지척이 바다임에도 파도소리와 갈매기소리만 들린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깊은 산속이란 착각이 들 정도다. 타박타박 걷는 자드락길이 소꿉놀이처럼 정겹다. 어느 순간 발치 끝으로 고사리 순이 보인다. 가만히 살펴보니 고사리 밭이다. 봄이 늦어 나뭇가지처럼 딱딱하게 굳었지만 한때는 부지런한 할머니께나 불려들었을 성싶다. 거기에 산 쪽으로 굽바자처럼 들어선 어린동백나무들이 마중지봉(麻中之蓬)처럼 쭉쭉 뻗어서 올곧다. 훗날의 꽃 잔치가 기대되는 길이다. 일찌감치 축복을 누리는 듯 새파란 등짝에 동그란 눈의 동박새가 포르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