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⑰가을걷이가 끝나면 견벽청야

어래산에 눈이 덮이면 칼바람이 불어오고 마을 앞 들판은 아이들의 놀이터와 공수부대의 훈련장으로 변했다.

2019-12-09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에서 가을걷이' 하면 벼를 베서 타작하는 것이었다. 갱빈 밭의 콩 타작, 무 배추 뽑기 등은 허드렛일 정도로 여겼다. 벼 타작과 보리갈이를 마치고 김장하기, 메주 쑤기, 지붕이기(초가지붕을 새 볏단으로 가는 일)를 하다보면 계절은 어느새 겨울로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곳간에 나락(벼) 있고, 마당에 짚 볏가리 있고, 장독에 김치 있으니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나락 찧어, 짚 때서 밥 짓고 방 뜨뜻하게 하고, 김치 반찬 하나면 온 가족이 행복했다. ‘제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큼 보기 좋은 것 없다말은 진솔한 고백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쌀밥, 그것도 햅쌀밥이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김치 먹을 때는 젓가락이 필요 없었다. 어머니가 손으로 찢어 놓은 배추김치를 숟가락총 끝에 걸쳐 높이 쳐들고 입안으로 내리면 밥은 그새를 못 참고 이미 목젖을 통과한 뒤였다. 둘레판(두리반) 위에는 행복이 가득하고 가족들의 웃음소리는 문풍지를 뚫고 마당으로 퍼져나갔다.

동지(冬至)를 시작으로 명절이 시작됐다. 구정(), 보름, 이월이 꼬리를 물었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이 추가됐다. 음력설과 정월대보름, 이월이 보름 간격으로 이어져 동지팥죽 먹고 나면 설맞이로 엿을 고우고, 보름에는 오곡밥, 이월에는 쑥떡을 만들어서 먹었다. ‘이월'은 음력 2월 초하룻날 쇠는 명절로, ‘영등(靈登)할매'가 바람타고 내려오는 날이라 하여 아이들은 연을 날리고 어른들은 부엌에서 소지(燒紙)를 올렸다. 연싸움을 벌일 때면 연줄이 끊어져서 양동산 쪽으로 높이 날아갔다. “가오리연이 포항바다까지 날아가면 가오리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이는 한 해 네 번 먹었다. 동지팥죽 속에 있는 새알을 나이만큼 먹고, 신정, 구정 그리고 생일에 또 나이를 먹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열린 성탄축하는 마을 유일의 문화발표회 자리로 자녀, 손자들의 재롱을 보고자 몰려들어 작은 예배당 안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마을과 들판의 모습은 견벽청야(堅壁淸野)'였다. 집집마다 짚 볏가리가 성()처럼 높이 쌓여 견벽'이었고 들판은 휑하니 비어 있어 청야'였다. 견벽청야는 삼국지 소설에 나오는 방어전술로서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들에 있는 모든 곡식을 모조리 성내로 걷어 들여 공격해 오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마을

눈 내린 마을과 주위는 시베리아 벌판을 연상시켰다. 새벽기도회 가는 길에 쳐다 본 밤하늘은 쏟아질 듯 반짝거리는 별들로 가득하고 눈으로 덮인 들판은 낮처럼 환했다. 양동산 위로 먼동이 트면 눈을 뒤집어쓰고 있던 초가집 굴뚝에는 아침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동네 개들은 몰려나와 들판을 뛰어 다녔다.

어래산 쪽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눈이 다 녹을 때까지 사람의 뼛속을 파고들었다. 양동 쪽에서 안강으로 향하는 기차도 연기를 높이 뿜지 못하고 힘겹게 달렸다. 참새는 떼를 지어 지붕 위로 날아다니고 까마귀는 눈 속에 묻힌 보리 싹을 파먹었다.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 큰거랑에는 청둥오리가 몰려들었다.

때때로 포항 해병대 공수훈련(空輸訓練)이 마을 앞 들판에 펼쳐졌다. 주로 바람이 없는 날 이른 아침이었다. 헬리콥터가 낮게 떠서 들판을 한 바퀴 돌아가고 나면 조금 있다가 커다란 군수송기가 높이 날아와 군인들을 떨어뜨렸다. 낙하산은 비행기에서 떨어질 때는 길쭉하다가 중간에 버섯처럼 부풀어 올랐다. 군인들은 바다에 낚싯바늘 연달아 풀려 나가듯 줄지어 뛰어내렸다. 비행기는 꼬리를 물고 날아 왔다. 훈련을 크게 할 때는 들판이 온통 군인들로 새까맸다.

낙하훈련 전에는 반드시 신호탄을 먼저 떨어뜨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하도록 했다. 군인들은 붉은색, 노란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지점으로 낙하했다. 미군일 때도 있었고 국군일 때도 있었다.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다말고 논으로 달려가서 낙하산 접는 것을 도와주고 초콜릿을 얻어오곤 했다. 어떤 때는 일부러 바람이 부는 날을 택한 것 같았다. 군인들은 낙하산에 끌려 논둑을 서너 개씩 타넘었다. 그때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나가서 낙하산 줄을 잡아주었다. 낙하산을 챙긴 군인들은 대열을 지어 군가를 부르며 안강-기계 도로까지 가서 대기하고 있던 트럭을 타고 돌아갔다. 마을 앞 들판은 평지에다 전봇대가 없어서 훈련하기 좋았을 것이다.

마을 바로 앞 중동댁 논은 매년 얼음지치기 장소로 제공됐다. 물을 끌어들여 만든 600평의 얼음판은 겨우내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스겟또(skate, 스케이트의 일본식 발음)’는 나무와 철사와 못으로 직접 만들었다. 어릴 때는 양반다리로 앉아서 타는 넓적한 것으로 타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쪼그려 앉아 타는 조그만 것으로 바꿨다. 청년들은 오늘날 스케이트처럼 두발로 휘젓는 스겟또를 만들어서 탔다.

날이 풀리면서 얕게 언 곳에는 고무얼음'이 생겼다. 단단하지 않아 스겟또가 지나갈 때마다 울렁거리는 얼음을 고무얼음이라고 불렀다. 고무얼음 통과하기 게임은 스릴만점이었는데 한 아이가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지면 끝났다. 앞거랑 얼음은 두껍게 얼어서 겨울이 다 가도록 탔다. 얼음을 지치다가 심심하면 말뚝을 뽑아 와서 공굴(다리) 밑에 불을 피워 놓고 젖은 옷을 말리고 추위를 녹였다.

왼편에

아이들은 짚볏가리에 등을 대고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미지게짜지게' 놀이를 했다. 양편으로 갈라, 서로 가운데로 밀어붙여서 어깨로 상대편을 튕겨내는 놀이다. 그 외에도 팽이치기, 자치기, 점수놀이를 했다. 어른들의 놀이로는 윷놀이, 화투놀이를 들 수 있다. 화투놀이에는 민화투, 육백, 나이롱뻥, 두장문이, 짓고땡이 등이 있었다. 고스톱이 들어온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청년들은 마을 뒤편에 있는 용강댁 논에서 축구를 했다. 우물 있는 마을 동편 논에서 할 때도 있었다. 골대는 적당한 간격으로 벌여 놓은 흙무더기가 전부였다. 때로는 여자아이들이 공놀이하는 고무공으로 야구를 했다. 공 크기는 테니스볼 만 했는데 속이 비어 있었다. 그 놀이를 우리는 깨스볼이라고 불렀는데 베이스볼(baseball)'을 그렇게 불렀다.

부지런한 농부는 개미콧등에 가서 깔비(솔가리)를 해다 나르고 밤이면 새끼 꼬아서 가마니를 쳤다. 다시 날이 밝으면 새벽 일찍 개똥망태를 어깨에 걸고 마을 가까운 논 한 바퀴 돌고 와서 소죽을 끓였다. 비료가 귀하던 시절이라 사람과 짐승의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비록 마른 바랭이지만 베어다가 소를 먹이고 토끼풀을 뜯어다가 토끼장에 넣었다. 막스 베버(Max Weber, 독일의 사회과학자, 1864~1920)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성실한 농부를 성직자 반열에 올렸는데 소평마을 사람들이 그러했다.

1월 초 소한(小寒) 무렵이면 추위가 극에 달했다.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떡떡 들어붙었다. 당시는 온도계도 귀해서 문고리 들어붙는 정도나 얼음두께로 추위를 가늠하던 시절이었다. 매일 저녁 펌프의 고무패킹(packing, 자아올린 물이 안 내려가도록 막아주는 고무 밸브를 우리는 바킹이라고 불렀다)을 들어 물을 파이프에서 빼 내려야했다.

펌프가 생기기 전에는 세수를 앞도랑에 가서 했는데 얼음이 얼었을 때도 돌덩이로 깨고 했다. 앞도랑 물은 마을에서 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웅덩이에서 시작됐다. 웅덩이는 미뿌랑 약간 못 미쳐 농로에 붙은 오른쪽 논의 가운데 있었는데 지름 3m 정도 크기 물에서는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고 김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 데다 소죽솥에 데운 듯 따뜻한 것은 큰거랑 물과 같았다.

혹한 속에서 보리가 파릇파릇 자라듯 아이들은 눈바람을 맞으며 희망 속에 커갔다. 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물처럼,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