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⑬양동산과 갱빈

해와 달은 언제나 양동산 위에서 떠오르고 소먹이며 즐겁게 놀던 갱빈은 산 아래 펼쳐져 있었다.

2019-10-22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산은 남쪽에 무릉산(450m), 서쪽에 도덕산, 서북쪽에 어래산, 동쪽에 양동산이었다. 이 중에서 비교적 가까운 산은 양동산으로 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양동산'은 소평마을 사람들이 편의상 붙인 명칭이지 양동마을(2010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사람들은 '뒷산'으로 부르고 지도상에는 설창산(163m)에서 서쪽으로 펼쳐지는 이름 없는 하나의 작은 봉우리에 불과했다.

산 아래는 형산강으로 가는 기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산자락 바로 밑을 지나는 도로에서 소평마을 쪽 방천까지는 약 500m 쯤 됐는데 태풍이 오고 큰물이 질 때는 하천 가득히 황허강물처럼 도도히 흘렀지만 평상시에는 수량이 적어서 개울 수준이었다. 그때는 폭이 좁은 데는 5m, 넓은 곳도 10m에 못 미칠 정도로 좁고 깊이도 얕았다.

개울 주위가 모래다보니 큰물이 지나가고 나면 물길이 바뀌고 둑을 만나 소용돌이 친 곳에는 깊은 물웅덩이가 새로 생기기도 했다. 맑은 물은 쉴 새 없이 금빛 모래 위로 흐르고 버들치, 금강모치, 기름종개는 아이들의 눈을 피해서 쏜살같이 물을 거슬러 올랐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는 모래밭, 자갈밭이 펼쳐져 있었고 모래밭에는 쇠뜨기, 갯매꽃, 곰보배추 등이 자라고, 자갈밭에는 비오리, 댑싸리가 자라고 있어서 낫으로 베어다가 마당비를 만들거나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 강변을 우리는 '갱빈'이라고 불렀다.

방천을 따라 기계 쪽으로 200m 정도 가면 밭이 시작됐다. 방천과 양동산 간 거리가 멀어진 만큼 오랫동안 쌓인 모래톱은 둔치가 되고 사람들은 그곳을 밭으로 일궜다. 밭에는 철따라 주로 무, 배추, 고추, , 감자, 고구마, , , 땅콩, 기장, , 보리, , 수수, 옥수수 따위의 농사를 지었는데 아무리 애를 먹고 농사를 지어 놓아도 큰물 한번 지나가버리면 헛농사였다. 그 밭은 등기를 할 수 없어서 정식 소유는 안 되지만 권리금으로 매매됐다. 소평마을 사람들에게 밭작물은 논두렁콩, 앞거랑 둑의 부추, 열무 정도였고 갱빈 밭 있는 집은 몇 가정 되지 않았다.

1981년

마을사람들이 소 먹이러 가는 곳도 갱빈이었다. 소꼴 뜯기는 것을 '소를 먹인다'라고 했다. 초등학생만 돼도 학교에 다녀오면 으레 소를 몰고 갱빈으로 갔다. 소를 갱빈 둑에 올려놓거나 초지에 풀어놓아 물을 뜯게 하고는 목욕을 하다 물고기를 잡고 모래밭에서 씨름을 하거나댕까이를 하면서 놓았다. 댕까이는 남녀 할 것 없이 네 명 정도만 되면 두 편으로 갈라서 모래밭에 할 수 있는 놀이였다.

놀이터는 모두가 힘을 합쳐 발로 선을 긋는 것으로 간단히 만들 수 있었다. 폭은 3m 정도로 일정하였으나 길이는 한쪽 편의 사람 수에 따라 달랐다. 만약 3명이면 2m와 1m 단위 칸을 3칸 만들었는데, 2m는 공격자 안전구역이고 1m는 술래가 지키는 지역이었다술래는 가로 3m 세로 1m 구역 안에서 그 구역을 통과하려는 상대방을 터치하여 아웃시키고, 공격자는 가로 3m 세로 2m 구역인 안전지대를 3번 통과하여 되돌아오는 게임이었다. 술래가 3명 모두 터치하면 끝나고 반대로 공격자 측이 1명이라도 성공하면 3명 모두가 되살아서 게임은 다시 시작됐다.

때로는 콩 서리, 밀 서리, 감자 서리를 해 먹다가 주인에게 들켜서 벌을 받기도 했다. 손바닥과 입술이 시커멓고 불을 피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현장범의 증거는 차고 넘쳤다.

가장 심한 것은 소가 나락을 뜯어먹거나 밭에 들어가서 농작물을 망치는 것이었다. 주인에게 들켜도 보통은 꾸중을 듣고 훈방 조치되지만 피해가 심하거나 괘씸죄에 걸리는 날이면 통사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소를 먹이다말고 주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야 했고 아이의 아버지는 상당한 보상을 약속해야 했다. 그날 저녁은 칼국수이거나 호박잎 뜯어 넣은 맛있는 수제비였지만 아이는 입맛을 잃었다. 

양동산으로 다니는 길은 경지정리하면서 곧아지고 넓혀졌다. 옛날 길은 마주 오는 소달구지 두 대가 비켜가기 힘들 정도로 좁고 두루마기 옷고름 풀어놓은 듯 했다. 거기다 수로가 제대로 나 있지 않아서 논의 물이 넘쳐 길 건너편 논으로 흘러들기 예사였다. 어떤 때는 물길 따라 가던 미꾸라지나 붕어가 길바닥에서 퍼덕거렸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치면 노을이 질펀한 물에 어리고, 구불구불 한 줄로 늘어서서 마을로 들어가는 소의 행렬은 실크로드를 걷는 낙타를 연상케 했다. 아이들은 자기 덩치만큼이나 큰 꼴망태를 오른쪽 어깨를 걸치고 몸을 왼쪽으로 휘어지게 해서 걸었다. 어떤 아이는 소등에 올라타고 소를 몰았다.

소는 걸으면서 똥오줌을 누고 꼬리는 하루살이를 쫓느라 쉴 새 없이 일렁거렸다. 어미 따라 걷던 송아지는 가끔 체조선수처럼 곡예를 부렸다. 마을은 풍경은 이미 실루엣, “고개 넘어 또 고개 아득한 고향, 저녁마다 놀 지는 저기가 거긴가,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날리며, 아이들도 지금 쯤 소 몰고 오겠네”‘고향땅'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하는 분위기였다. 윤석중 작사 한용희 작곡의 동요다.

안강-기계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짚을 땔감으로 사용했지만 겨울에서 이른 봄까지 농한기에는 나무하러 양동산으로 갔다. 양동산에는 떡갈나무가 많아서 봉우리의 북쪽 끝에 이어지는 소나무가 많은 다른 산으로 갔다. 그 산은 가파르기가 그지 없어서 개미콧등으로 불렸는데 산을 내려오다가 허기진 배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지게를 처박으면 나뭇짐은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처럼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수수께끼에 '이 산 저 산 다 잡아 먹고 아가리 딱 벌리는 것은?'이라는 게 있었다. 정답은 '아궁이'였다. 모두가 대나무 까꾸리(갈퀴)로 매일 긁어 대서 어디 가서 깔비(솔가리) 한 짐 하기는 약초구하기 만큼 어려웠다. 나중에는 철사로 만든 까꾸리가 등장했다.

개미콧등과 양동산 사이 골짜기로 들어가면 안계못'이 나왔다. 이 저수지는 1971년에 건설됐는데 포항제철에 공업용수를 제공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해와 달은 언제나 양동산 위에서 떠올랐다. 오뉴월 염천(炎天)이면 이른 아침에 벌겋게 솟아오르는 해를 보는 것만으로 벌써 숨이 차올랐다. 멀리 도덕산 너머로 사라지기까지 평야의 낮은 길고 길었다. 달이 뜨는 곳도 양동산이었다. 정월대보름과 한가위 때는 이제나저제나 능선을 쳐다보며 달이 뜨기를 학수고대했다. 양동산은 마을 사람들의 시계탑이었다. 시각에 맞춰 해와 달과 별을 내 보내 낮밤을 주관하게 했다.

마을 아이들이 양동산 정상에 주로 오르는 날은 정월대보름이었다. 당시는 보름달 보러 가서 생솔가지를 꺾어 불을 피우고 연기를 뿜어 올리는 게 유행이었고, 저녁뉴스는 전국적으로 산불 몇 군데 났다는 소식을 빠트리지 않았다.

산 위에 올라가보면 여기저기 6.25전쟁 때 파 놓은 참호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이들은 용수철로 된 장난감을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뒤졌다. 나중에 군대에 가서 알고 보니 M1소총의 노리쇠 공이(탄환의 뇌관을 쳐 폭발하게 하는 장치)였다. 여덟 발들이 탄창을 찾아내서는 엿을 바꿔 먹고 용수철 공이를 튕겨서는 친구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사람의 바짝 마른 뼈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 때 묻어놓은 지뢰를 건드리거나 불발탄으로 남아있던 수류탄이 폭발하여 인명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려오면서 양동산에 오르는 것도 점차 뜸해졌다.

안강북부초등학교

'안강지구전투는 국군 제1군단의 명령을 받은 수도사단이 195089일부터 914일까지 안강·포항·경주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92일 기계 비학산 일대에 있던 북한군은 전차를 선두로 기계-안강 도로를 따라 내려와서 수도사단 제18연대를 우회 공격함으로써 아군의 서쪽 방어선을 돌파, 경주로 남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도사단 제17연대가 912일 야간에 곤계봉(293m) 탈환에 성공함으로써 안강 남쪽의 주저항선을 회복하고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국군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적을 추격해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강지구전투 참조]

‘6.25전쟁1129’[20141110일 이중근 발행]에는 913일에 (곤계봉) 진지를 탈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15회 이상의 전투 끝에 얻은 값진 승리였다. 이어서 국군은 916일 반격을 개시하여 918일 안강과 기계를 탈환했다. [미래한국, 20151016일 기사 참조]

양동산은 이때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소평마을 사람들은 전투의 가운데 들어있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필자의 어머니 황분조 씨(87)밤중에 군인들의 논을 가로질러 가는 소리가 소나기 몰려오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