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덕의 '신발론'
마경덕의 '신발론'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7.26 13:25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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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의 ‘신발論’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시집 『신발論』 문학의전당 2013-07-15

 

2017년 9월 30일에 이사를 했다. 포장이사라지만 주인 손이 필요치 않는 것이 아니었다. 손보다 눈이 더 절실했다할까. 오래 사용한 가재도구 대부분을 버리고 새로 샀다. 구입한 물품들이 이삿짐과 동시에 들어오는 바람에 낯선 이들이 오고 갔다. 정신없고 어수선한 와중에 신발박스가 없어지는 것을 몰랐다. “이 박스 현관에 둘까요?” 센터 직원이 ‘신발’이라 적힌 문구를 읽었던 것이고 나 역시 곧바로 알아채고 “네” 짧게 답했었다. 그러니 집 안까지 들어온 건 확인된 셈이다. 누구의 손을 탔는지, 그 박스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황당하고 아까웠지만 새집에서 새 신 사 신고 열심히 뛰라는 액땜으로 치부할 수밖에 도리 없었다.

맨발로 왔다가 맨발로 떠나는 게 인생이라고 하던가. 사람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신발을 신는다. 아니다. 걷기 이전부터 신발이 필요하다. 일명 보행기신발이다. 요즘 아기들도 그렇게 자라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우리 아이들 키우던 시절에는 미처 두 발을 땅에 딛고 서기도 전에 신발을 신겨서 보행기에다 앉혔다. 기구를 이용해서라도 남보다 빨리 더 멀고 더 높은 세상으로 나가는 방법을 터득해보란 의미였으리라. 마치 어미의 성급함에 부응하듯이 사방팔방 두려움 없이 활달하게 휘젓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운 나래를 펼쳤다. 훗날 어떤 사람이 돼서 어떤 세계를 거닐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첫 행의 연월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기체 형식으로 시작한다. 한 편의 일기를 시로 탈바꿈하기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 시인의 역회전적인 인식과 자각이 단순한 기록에 머물 수 있는 일상을 멋진 시로 거듭나게 해준다. 좋은 시는 평이한 문장이나 상식적인 전개를 전복시키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論이란 시어에서 독자는 이미 짐작하겠다. 시를 끌고 가는 논리가 조직적이면서 짜임새가 잘 갖추어진 하나의 의미로 확장됨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자기반성적 사유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무릇 떠나간 배는 새 배로 돌아오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