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17)
녹슨 철모(17)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7.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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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장 박 준장의 일과는 전 군단 장교들에게 시덥잖은 온갖 간섭을 다 하는 것이다. 사단에 있으면 최고 어른으로 아무 말 안 해도 밑에서 알아서 할 텐데 군단에서는 장군 중에는 막내인 박 준장이라 마치 전방 보병 분대장처럼 온갖 시시껄렁한 일에 온 힘을 다 한다. 차량들이 부대 안에서 과속으로 달린다며 짜증을 내었고 장군식당 깍두기가 잘 익지 않았다고 화를 내었다.

"야! 군의관 너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또 참모장이 시비조로 말을 시작하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 대위가 묻자 대뜸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너는 말이야, 퇴근하면 어떻게 도통 찾을 수가 없어? 또 연락이 되더라도 오는 시간이 몇 시간씩이나 걸리고 말이야. 너 서울서 살림하나?"라고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한다. 이럴 때 그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욕설을 듣거나 아니면 '쪼인트‘가 까인다.

고맙게도 본부 대장이 대신 나서주었다.

“참모장님, 의무실장은 군인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전화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변명 삼아 말해주자 참모장이 엉뚱하게 되물었다.

"그럼 길바닥에 천막 치고 사나?”

“그게 아니고요. 민가에서 월세 살고 있지요.” 

이렇게 설명을 하자 참모장은 굉장히 화를 내며 책상을 쳤다.

"아니 우리 아파트가 세 채나 되잖아? 그 큰 단지에 왜 군의관이 살지 않는 거야?" 

우 대위는 이번 기회에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군의관 아파트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전근할 때마다 군의관끼리 인수인계 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 대위가 오기도 전에 이미 인사처에서 높은 계급의 보병장교나 특수직책의 장교들에게 군의관 관사를 주어 버리고 없었다. 우 대위가 인사처에 가서 항의하자 그들은 순서가 다섯 번째라며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장교들의 이사는 열 번도 더 넘었건만 인사처에서는 다섯 번째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아니 어떤 때는 일곱 번째라고도 하였다.

“그러면 전화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응급환자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하나?" 

참모장은 끝까지 확인하려는 자세로 또 물었다.

“그땐 앰블런스가 옵니다.” 

이번에는 우 대위가 대답하자, 참모장은 속이 다 뒤집어진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중단하였다. 전화는 다음 날 바로 가설되었지만 우 대위의 아파트 입주는 그 후로도 마냥 미루어지고 있었다. 우 대위는 작심하였다. 어차피 힘에 의해서 입주가 결정되고 연줄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자신은 명분으로나 뭐로나 뒤로 밀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어 아파트 관리병에게 달려갔다.

"이 병장! 앞으로 이사 갈 집이 생기면 바로 의무대로 연락 좀 해줘”라고 그에게 미리 당부를 해두었다. 이러고 며칠 되지 않아 바로 아파트 관리병에게서 급하게 전화가 왔다. 지금 이사 가는 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우 대위는 위생병들을 데리고 앰블런스에 이삿짐을 싣고 아파트로 날랐다. 간단히 이사가 끝나 버렸다.

다음 날 아침 군인 아파트 정문 앞에서 난리가 났다. 인사처 심 소령이 통근버스를 타려고 서 있다가 난데없이 어느 중령에게 얻어맞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전방에서도 장교가 장교를 두들겨 패는 일은 잘 없는데, 가족들이 살고 있는 군인 아파트 앞에서 이런 폭력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전 군단이 이 일로 떠들썩하였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는 그 중령이 이사 오기로 한 집에 우 대위가 새치기하여 이사하는 바람에 아파트 담당관인 심 소령이 구타당하였다는 것이다. 심 소령은 출근 않고 집에 누웠다고 했다. 그날 밤 심 소령의 아내가 우 대위의 집으로 찾아와 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봐요. 군의관! 당신이 왜 그런 엉뚱한 짓을 해서 우리 남편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거요?"

그녀는 독기를 잔뜩 품은 얼굴로 삿대질을 하였다. 군대 속담에 여자들의 계급은 남자보다 하나 더 높다고 한다. 이 경우 심 소령의 마나님은 중령에 해당하는 몸짓과 말투로 대위를 다룬다. 우 대위는 속으로 웃음이 다 나왔다. 군단 내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일개 아녀자가 떠들고 악다구니만 써대니 가소로운 웃음이 나왔다. 태원은 이런 경우는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준비대로 진행할 뿐이다.

"사모님, 뭘 알고 따지기나 하세요. 원래 아파트에는 전화가 딸린 군의관용 관사가 정해져 있다고요. 그런데 인사처에서는 그런 규정을 어기고 순서를 무시하고 계급이나 연줄에 따라 아파트를 나눠줬어요. 거기까지는 제가 관심 가질 일은 아니고요. 정말 인사처에서 실수한 건 군의관 관사마저 그런 식으로 남들에게 줘버린 거죠. 이건 겁이 없는 건지 군의관을 깔본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전 그동안 좋은 게 좋다고 아무 말 않고 참고 지냈죠.”

다행히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심 소령 마누라는 잘 듣고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성질을 참지 못하고 악을 썼다면 아침에 그녀의 남편이 중령 혼난 것처럼 저녁에는 그녀 자신이 대위에게 개 망신당할 수도 있었다. 보통 목소리가 크면 싸움에서 승리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는 게 이기는 것이다. 태원은 준비한 대로 침착하게 그의 전략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참모장님이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어요. 그날 제가 모든 걸 다 말했으면 심 소령은 아마 군법회의를 통해 남한산성에 갔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차마 그런 말은 못하고 적당히 이유를 둘러대었는데 저만 한참 욕을 먹었어요. 그 후 다시 심 소령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는데도 또다시 저에게 집을 배정하지 않고 엉뚱한 신임 장교에게 배정하다가 이런 꼴을 당한 거예요. 폭행한 그 장교 또한 희생자인지 나쁜 놈인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억울한 생각이 드시면 참모장님께 호소를 하든지 아니면 헌병대에 고소하세요. 그러면 모든 게 법대로 규정대로 잘 될 겁니다.” 

이런 말을 다 듣고 나자 심 소령 부인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우 대위 집을 뒷걸음으로 나가고 말았다.

우 대위는 유 소위와 만났다. 우 대위는 자신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마음의 고통을 정신과 의사에게 호소하고 의논하는 기분으로 유 소위를 만나는 것인지, 아니면 한 남자로서 여자인 유 소위를 만나고 있는지 스스로도 그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정신과 면담을 하자면 선배인 정신과 과장을 만나면 된다. 또 여자를 만나고 싶다면 병원에는 유 소위보다 훨씬 더 예쁘고 애교스런 간호 장교들이 많이 있지 않는가? 하지만 우 대위는 그저 유 소위가 보고 싶었다.

“제가 보기에 실장님은 높은 사람 비위를 잘 못 맞추시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태원은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의 생각에는 ‘옳지 않는 높은 사람들’의 비위를 못 맞추는 것 같은데 그녀는 이렇게 쉽게 ‘모든 높은 사람들'이라고 단정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 소위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았다. 태원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대통령부터 야전병원장, 군단참모장 그리고 정치가, 사이비 운동권 등 아무나 불평하고 비난해댔으니 그녀가 그런 판단을 할 만도 하였다.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전 그런 실장님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어떤 모습이 연상 되냐면요. 허만 멜빌의 ‘백경'에 나오는 선장 ’에이헵‘을 보는 느낌이지요. 흰고래를 잡기 위해 사나운 파도를 헤치는 그 선장 같은 느낌이에요.”

태원은 유선영 소위의 이런 점이 좋았다. 그동안 그가 만나 온 여자들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선영의 이런 사고방식이나 태도가 태원에게는 매우 따뜻하고 포근한 엄마의 품처럼 느껴졌다. 유 소위는 그보다 나이도 어리고 계급도 낮았지만 하는 이야기마다 우 대위의 가슴을 항상 촉촉하고 넉넉하게 해주었다. 지금껏 태원이 만난 여자들은 그가 사랑해 주어야 되는 사람, 그리고 나중에는 그가 소유하게 되는 그런 부류들이었다. 하지만 선영에게서는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넉넉함과 소유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은, 그런 느낌이 여느 여자와 달랐다.

“실장님은 뭐가 장점인 줄 아세요? 잘 모르시죠?”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미 군단과 병원에서도 소문이 났지만 실장님은 우선 깔끔하세요. 그리고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그런 게 큰 장점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끊었다. 태원은 불안해졌다.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렇지만 당신의 단점은...” 하고 이야기가 이어질 차례가 아닌가.

“저는 군인이긴 하지만 보병부대에서는 한 발 떨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조금 객관적으로 볼 수가 있는데 실장님의 그런 태도는 군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하더라고요. 아니, 밖에서라도 약점이 될 수 있어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흥미가 생겼다. 그간 뭔가 꼬이고 안 풀리던 수수께끼가 해결되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세요. 실장님의 생각과 행동은 많은 보병 장교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지요. 가만히 있어도 미워할 판인데 그런 사람이 ‘나 잘났소. 나만 옳소' 하듯이 뛰어다녀 봐요. 누가 좋아하겠어요?"

태원은 깜짝 놀랐다. 뭔가 확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때 그녀가 별안간 깔깔깔 하고 크게 웃었다. 그녀의 이런 웃음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았거나 좀 쑥스러울 때의 버릇이었다.

"실장님, 미안해요. 제가 괜히 아는 것처럼 까불었어요.” 

이 말을 하고 옆으로 앉으며 웃는데 태원은 그녀를 꽉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선영을 만나고 오는 차 속에서 태원은 다시 그녀가 또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고 싶었다. 군인 아파트가 가까워오면서 그녀의 생각을 지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