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예학(禮學)의 거두 김장생을 모신 돈암서원(3)
[우리 산하] 예학(禮學)의 거두 김장생을 모신 돈암서원(3)
  • 이승호 기자
  • 승인 2019.07.1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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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서원 9곳 중 충청도 유일의 서원 돈암서원

조선시대 예학의 태두 김장생을 모신 돈암서원(3)

마침 돈암서원에서 선비체험을 하고 있다
마침 돈암서원에서 선비체험을 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으로 무장·필암서원에 이어 세 번째로 돈암서원을 찾았다. 이 곳은 대전에서 논산으로 향하는 1번 국도변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다. 앞에는 연산천이 흐르고 뒤로는 고정산이 둘러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에 즐비한 한옥이 보인다. 서원이 아니고 논산한옥마을이다. 예학관, 체험관1·2·3, 유물전시관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 주차 후 왼쪽으로 약100m를 걸어서 들어가면 홍살문, 하마비와 입구 겸 외삼문인 산앙루(山仰樓), 강당인 응도당(보물 제1569호), 유생이 기거하는 동재(거경재), 서재(정의재), 사당인 숭례사(유경사)가 여느 서원과 다름 없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평지에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다.

사계의 문하생들이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그의 아들 김집 부자(父子)의 학문과 덕행을 적은 원정비(院庭碑)가 강당 앞에 있는 점과 사당을 둘러친 내삼문에 글귀를 적은 꽃담이 특이하다. '지부해함(地負海涵):대지가 만물(萬物)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萬川)을 포용한다.'는 글귀도 있다.

사당인 숭례사(崇禮祠)에는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4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위패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날짜를 적은 나무패를 말한다. 종이로 만든 신주는 지방이라고 한다. 사당의 주향(主享)인 사계 감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본관은 광산,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송일필에게 예약을 율곡에게 성리학을 배워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거두라고 한다.

사계 제자들의 일화를 소개해본다. '그 옛날 경상도 상주의 유학자 우복 정경세가 돈암서원의 사계를 찾아와서, '선생의 문하에서 사윗감을 찾고자 합니다.' 라고 고하자 사계 선생이 '마침 세 사람이 공부를 하고 있으니 마음에 드는 대로 선택하시지요'라고 허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복 선생이 서원 마당에 들어가 인기척을 하자 마자 첫 번째 선비가 마당까지 내려와 정중히 인사하고 방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가니 두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한 선비는 방문객을 한번 처다보고 읽던 글을 계속 읽었고, 또 다른 선비는 의관도 갖추지 않고 아랫목에 옆으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눈이 화등잔만 했다. 그런데 손님이 들어와도 일어나지도 않은 채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복 선생은 세 명의 젊은 선비를 비교했다. 첫 번째 선비는 예의가 바르고 나무랄 데 없으나 선비의 몸가짐으로는 약간 가벼운 듯하고, 두 번째는 인물도 준수하고 성품도 바르며, 쉽게 움직이지 않은 선비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 선비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범상치 않아 크게 될 사람 같으나 너무 강하여 평지풍파를 일으켜 딸이 고생 할 것 같아서, 두 번째 선비를 사위를 맺었는데 그가 바로 동춘당 송준길이었고 그리고 처음 마당까지 내려온 사람이 초려 이유태이고 누워서 눈만 멀뚱멀뚱한 선비가 우암 송시열이었다고 한다.'

안내:입장료와 주차료는 없다. 
인근에는 탑정호, 개태사, 
계백장군 유적지, 관촉사가 있다.

동재•서재, 강당, 사당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정비가 눈에 띈다
동재•서재, 강당, 사당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정비가 눈에 띈다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는 사당인 숭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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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담에는 꽃담장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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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큰 입구 겸 외삼문인 산앙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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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표충사(表忠祠) 신숭겸 장군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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