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천봉산 성황사 남매상 이야기
상주 천봉산 성황사 남매상 이야기
  • 김항진 기자
  • 승인 2019.07.15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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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너추리 초입에서 영암각(靈巖閣)에 이르는 길

상주시 만산동(蔓山洞)은 위치 지번으로는 상주시 만산동 482. 바깥너추리(현 상주교육 지원청이 있는 마을), 안너추리(마을 초입에 저수지가 있는 마을), 산태골(상주중학교 뒤편), 자산(침천정 지나 안쪽 마을) 등 크게 네 곳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안너추리는 만산동 중에서 중간에 위치하는 마을로 함창방향으로 진행하다 상주세무서를 조금 지나 좌회전하여 천봉산 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물론 상산전자고등학교 근처에 위치하는 영빈주유소로부터 상주중학교 후문으로 가다가 우회전하여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흥룡사와 들마라는 곳도 안너추리 마을에 속한다. 너추리는 식물의 넝쿨이라는 의미의 한자로 넝쿨 만(蔓)자를 쓴다. 옛날 박씨 성을 가진 분이 집안의 번성을 위해서 이 마을로 이사를 오기도 했다고 전한다. 박은 넝쿨이 잘 뻗어야 된다는 발상이었으리라.

마을 초입에 영암각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 있다.이정표 주변에는 돌로 쌓은 탑이 서 있는데 이 탑은 1997년에 복원된 것으로 이전에 있던 돌탑은 1980년대에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해체되었다. 그러나 돌탑이 해체된 이후 우연찮게도 마을에 우환이 생겨 동민들의 뜻을 모아 199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다. 지금의 돌탑은 해체되기 이전의 돌탑보다는 조금 조야하다는 느낌이 있다.현재 돌탑 옆에는 상주시에서 마련해 준 쉼터가 있어 복원한 돌탑에 올라가서 쉬는 일은 거의 없으나 과거 특히 여름철에는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이 있어 농사일로 피곤한 농부들이 낮잠을 즐기던 장소였다.마을 청년들이나 학생들은 돌탑 위 바닥에 고누를 그려 두고 내기를 하곤 했다.돌탑 옆에는 무거운 들돌이 있었다.

 

들돌은 옛날의 놀이도구 겸 운동기구로 마을마다 크기가 다른 단단한 둥근 돌 2개 정도를 준비해 두고, 마을 청소년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데 이용하였다고 한다. 어지간한 장사가 아니면 들지 못할 정도의 둥근 큰 돌인데 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흐르던 도랑을 복개하면서 들돌이 매립된 듯하다. 후손에게 길이 전해져야 할 의미 있는 문화 자산이 사라져 버려 아쉬움이 았고 돌탑 옆에는 선돌이 서 있다. 돌에는 불 화(火)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아마도 화마를 막기 위한 주술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돌탑을 덮고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280년 정도로 상주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50여 m 더 올라가면 또 한그루가 있으나 지금은 고사하여 썩은 몸뚱이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예전에 나무로 취사를 하던 시절에도 이 느티나무의 낙엽이나 삭정이는 절대 이용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왜냐하면 이 느티나무의 낙엽으로 밥을 지으면 밥이 퍼렇게 변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느티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신성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돌탑을 덮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느티나무는 상당히 여성스러운 자태를 드러낸다.

수피(樹皮)도 거칠지 않고 여성의 가슴을 닮은 듯한 나무 혹은 여자의 모습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어릴 적 나무에 올라 놀기도 했고 여름철이 되면 피를 토하듯 밤새 소쩍새 울음소리만이 가득하던 느티나무다. 반면 위쪽에 있던 느티나무는 수피가 상당히 거칠어 과거에도 나무에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누가 보아도 남성적인 모습 느티나무였다. 이 나무 옆으로 도랑이 흘러 마을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며 담소를 나누던 곳인데 지금은 도랑이복개되어 흔적이 없다. 도랑을 복개한 것이 영향을 주었는지 느티나무는 지금의 모습처럼 말라 죽고 말았다. 여름 한철 남자들은 돌탑에서 주로 휴식을 취하고 여자들은 위쪽 느티나무 밑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과거 학창시절 걸어서 학교를 다니던 때, 오후 늦게 또는 밤에 이곳을 지나려면 2차례에 걸쳐 무수한 눈초리의 검열을 받는 느낌이었다. 누구네 집 누구인데 어떠하다는 둥 보이지 않는 뒷 담화를 들어야 했던 곳이다. 두 번째 느티나무를 지나 왼쪽 길로 접어들면 영암각으로 가는 길이다. 마을을 거의 벗어나 왼쪽으로 굽어들면 수녀원 숙소와 차(茶)문화 교육원이 있다. 과거 여기서부터는 농로여서 큰 차가 다니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지금도 차 한 대 정도가 다닐 정도로 교행이 되지 않는다. 1996년 경북도민체전이 상주에서 개최될 당시 천봉산에서 성화를 채화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농로가 현재의 넓이 정도로 넓혀지고 시멘트로 포장되어 차가 다닐 수 있게 되었다.이 길 주변의 농토는 전형적인 천수답으로 가뭄이 심하면 모내기를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비를 기다리다가 결국 모내기가 늦어지면 어쩔 수 없이 구황 작물로 메밀을 심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시에서 마을 초입의 놀이터에 관정을 파서 물을 천봉산 자락까지 퍼 올리는 지원을 해 준 덕에 이제는 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모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노령화 탓인지 일부 논들이 감나무나 복숭아나무 밭으로 일부 대체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농로가 끝나는 영암각 앞에는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어 이용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영암각 들머리에는 산불 감시초소가 있다. 예전에는 초소 뒤편에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어릴 적에 소풍은 대개 가까운 절을 많이 찾았다. 시내에서 가까운 절은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지금처럼 차를 빌려 멀리 소풍 갈 형편이 되지 못하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이곳은 절이 아니라 성황당이 있는 곳이지만 소풍갈 곳이 별로 없던 시절에는 여기에도 초등학교에서 소풍을 왔었다. 그럴 때면 초가집에 살던 주인이 나와 ‘농작물을 밟아 피해가 많다’며 소풍을 오지 못하게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여기서 산길을 오르면 임란북천전적지가 있는 곳에서 천봉산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와 안부(鞍部)에서 만나게 된다. 직진하여 산을 내려가게 되면 안양 마을에 이르게 되고 더 가면 노악산 중턱에 있는 중궁암까지 갈 수도 있다. 예전에 나무로 취사와 난방을 하던 시절 천봉산에 땔나무가 귀하여 때로는 재 너머 노악산까지 나무를 하러 갔었다고 하니 고단했던 시절을 다시금 돌이켜 보게 한다. 천봉산은 영험이 많은 산으로 알려져 전국의 무속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천봉산은 바위산이다. 성황당에서 북북동쪽으로 천봉산의 7부 능선 정도에 아주 큰 절벽 바위가 있다. ‘천지당’이라고 불렸는데 과거 숲이 우거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여기에서 무당들이 굿을 하곤 하였다. 멀리서도 바위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들이 크게 자라 바위를 가려서 확인하기가 어렵다. 요즘은 산이 험하여 이용을 하지 않는 듯하다. 다만 남매 성황당 왼편으로 20여 미터 가면 굿터가 있어 대개는 거기서 굿을 한다.

굿터를 이용하려면 소정의 이용요금을 내야 한다. 안너추리 마을에서 청소 명목으로 비용을 받는 것이다. 아름다운 설화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천봉산 성황사 남매 탑 이야기

상주시 에 소재한 천봉산은상주의 풍수지리적으로 안산이면서 진산이다. 만산, 부원, 남적, 봉강 등 여섯 자연마을을 품고 있어 산 끝자락 에는 자산산성과 호국성지인 임란북천지가 있고, 만산동 안너추리에는 남매상을 모신 성황사와 바위집인 영암 각 그리고 국사남매 성황당 등이 있다. 그만큼 천봉산은 고을제사 를 모셨던 성황사을 비롯한 민간신앙의 장소였다. 천봉산은 옛부터 상주사람들의 삶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 왔다. 천봉산은 하늘의 산이다. 높지도 않고 상주의 너른 들판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 하고 시내와 가까워 누구나 쉽게 접근 할수 있어 항상 등산객들로 붐빈다. 천봉산은 수많은 길들이 능선으로 이어지고 연결되어있어 옛부터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진다. 상주 천봉산은 태백산과 계룡산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무속인 그들은 믿고 있다. 성황사에는 남매상이 있다. 왜 하필 남매상인가,

이곳에는 전설이 있다.

천봉산 밑에서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아주 착하고 심성이 고운 과년한 딸과 살아가고 있었다. 딸 이쁜이는 봄에는 산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열매를 줍고, 겨울에는 땔감을 하여 부모님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천봉산에 호랑이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천봉산을 터전으로 살아 왔지만 호랑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 일이었다. 봄. 여름.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어 천봉산에 땔감을 하러가서 내려오다가 이쁜이는 미끄러져 다치게 되었다. 차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커다란 물체가 앞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는가. 쫒아 보아도 굼쩍도 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맴돌다가 갑자기 들어 닥치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호랑이가 아닌가. 이쁜이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른 후 눈을 떠보니 깊은 산속 어느 암자 앞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호랑이가 덮치는 것만 생각 날뿐 몸을 움직일 수가 없고 몸이 아파 신음하고 있는 데 방문을 열고 한 스님이 나왔다. 얼마 간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눈 을 떠보니 법당 안이었다. 스님의 극진한 간호로 자기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스님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하게 되었다. 상주 천봉산 안너추리에 살고 있는 김씨 성을 가진 이쁜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자신이 왜 이 먼 계룡산까지 오게 됐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대사 생각해 보니 몇 해 전 한 호랑이의 목에 걸린 인골을 뽑아준 일이 있었다. 이놈이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대사를 장가보낼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대사는 오직 불교공부에만 정진하고 있었다. 처자는 그동안 흠모의 정이 들어 대사님을 잋을 수가 없게 되었다. 봄이 되자 처자를 데리고 상주 천봉산 부모님 집으로 가서 그동안 일을 이야기했다. 처녀와 헤어지기 위하여 여러 날을 고심하다가 처자의 간곡한 애원과 부탁으로 처자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었다. 처자와 함께 계룡산으로 돌아온 대사는 사찰을 새로 짓고 암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불교정진에 힘썼다. 그가 입적한 후에 사리탑을 세운 것이 갑사의 남매 탑이고,상주 천봉산에는 성황사를 짓고 남매상을 모시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다.

길을 달리하여 성황당에서 마을 쪽으로 천봉산 기슭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삼백여 미터 지점에 ‘장샘’이라는 곳이 있다. 장샘은 옛날부터 바위틈에서 나는 물이 많아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 물을 끌어와 간이상수도로 이용하기도 했던 곳이다. 겨울에도 물이 차갑지 않아 당시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곤 했다. 간이상수도로 이용하기 전에는 무당들의 굿터로도 이용되던 곳이다. 그러나 간이상수도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과거처럼 원상회복을 했으면 좋으련마는 그대로 방치되어 지금은 이도 저도 사용하지 않아 찾는 이의 발길이 아주 끊겨 오솔길조차 희미한 지경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