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리의 '치자꽃 설화'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7.19 09:19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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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불로동꽃시장
2019-07-15 불로동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작과비평사. 2004-02-15

 

치자꽃이 미니소시지처럼 생겼다던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꽃과 소시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지만 은유적 표현인가 싶었다. 잠시 분위기 살피며 바로잡기를 망설였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알게다. 파란 달빛 아래 하얀 치자꽃, 어둠 속에서도 기죽지 않던 고혹적인 자태를. 대부분의 꽃들이 향기를 앞세워서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듯이 은은한 냄새가 여름밤의 무더위를 잊게 했다. 감수성이 무딘 사람도 매료되기 충분한 꽃이다. 할머니는 제사나 명절이 되면 말린 치자를 짓찧어 물에다 담갔다. 노란색이 비밀처럼 풀어졌다. 그 물로 반죽하여 생선전을 부치고 고구마전도 부쳤다. 그러니까 지인이 언급한 소시지는 치자열매를 말한 것이었다.

‘치자꽃 설화’에 언젠가 명치끝을 누르고 읽었던 수필 한 편이 포개진다. ‘시니어문학상’ 당선작이다. 집안의 대들보처럼 믿었던 큰아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유수한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교수의 길을 걸을 줄 알았단다. 좋은 곳에서 중매도 들어왔다고 하니 이제 한시름 놓을 줄 알았으리라. ‘부처님께 귀의하여 포교활동을 하며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뜻밖의 편지를 받는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이미 확고한 아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느닷없는 게 삶이라지만 처연하고 무게감 있는 줄거리였다. 그 어머니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헤아리기조차 미안했다.

박규리 시인은 8년간 공양주생활을 한 사람이다. 관찰자시점의 화자는 어떤 애끓는 이별을 지켜본 듯하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이야기 시의 형식을 취한다. 스토리가 있으면 가독성이 좋은 건 당연하다. 달래서 보낸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이 느린 나는 열 줄 이상 내려가서야 눈치 챈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흔치 않은 일화에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청각적 심상을 시각적 심상으로 변주하는 시구들이 감각적이다. 어느 한 구절도 가슴 절절하지 않은 데가 없다.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에 얼마나 많은 뼈아픈 사연이 함축되어 있을까. 햇스님의 잿빛 등, 독경소리 깊은 산중, 다 싫은 화자는 돌연 자신이 버림받는 여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