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나무와 정경세나무
이황나무와 정경세나무
  • 장희자 기자
  • 승인 2019.07.11 13: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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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나무(우측)와 정경세나무(좌측)가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다.

이황(1501-1570)은 경북 안동 출신의 조선중기 학자로 호는 퇴계(退溪), 본관은 진성(眞城),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공직자로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벼슬길에 나선 이래 140여 차례나 벼슬이 내렸으나 79회나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뛰어난 교육자로서 사원건립에 힘써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학문적 모범을 보이며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조선 명종조에 향유들과 윤희렴(尹希廉)이 경산 향교 서북쪽 3리 평지위에 홀로 솟아 있는 산 북쪽자락,남천수가 굽이 감돌고 앞쪽에 넓은 들판,명당자리에 서재(書齋)를 건립하고  시(詩)와 서(書)를 강론하던 이곳에 재실을 짓고 퇴계선생에게 재호를 부탁하여 재(齋)는 고산(孤山)으로 문(門)은 구도(求道)로 한 퇴계의 수필을 받았다. 구도라는 편액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선생께서는 안동 도산에서 먼 이곳까지 오셔서 강학(講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느티나무를 직접 심었는데, 수령 300년 정도 된 이나무를 ‘이황나무’라고 이름지었다.

이황나무:성동로37길39-3(성동 172) 보호수 지정 2003. 1. 16., 수종 느티나무, 수령 300년, 수고 10m,

정경세(1563-1633)는 경북 상주 출신의 조선중기 학자로 호는 우복(愚伏), 본관은 진주(晉州),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전라도 관찰사,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냈으며 벼슬에 있을때 인사행정이 공정하여 인재를 가려뽑고 특정인을 감싸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경상감사 재임시 영남일대가 왜란 후유증으로 민심이 어려웠으나 선정(善政)을 펼쳐 백성들이 안정을 찾았다. 선생께서는 대구 부사 재임시 이곳에서 강학(講學)한 것을 기념하고 재임시 고을사람들의 교화와 민심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것을 기리기 위하여 심은 나무를 ‘정경세 나무라고 이름지어 부르고 있다.

정경세나무: 보호수, 수령 300년, 딱다구리가 구멍을 파서 집을 지은 자리가 있다.

고산서당은 앞쪽으로는  남천(南川)과 고산 들녘이 바라보이는 대구직할시 수성구 성동 산22번지 서원골 야산자락에 있다.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38년(1605)에 중건하였으며 선조40년(1607)에 우복 정경세가 대구부사로 재임 시 강회를 열었는데 이때 당(唐)의 도독(都督) 이성삼(李省三)도 수강하였다고 한다. 숙종16년(1690)에 서원을 창건하여 고산(孤山)이라는 원호(院號)로서 퇴계와 우복 두선생을 배향하였고 영조10년(1734)에 강당 및 서재를 건축하였으며 영조22년(1746)에 원자(院字)를 중수하였다. 정조13년(1789)에는 문루(門樓)를 세우고 연안인 김재구(金載久)가 기문을 택하였다. 순조22년(1822)에는 위패를 잃어 개조 봉안한 바 있으며 고종16년(1879)에 이르러, 고종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후 고종16년(1879)에 이르러 향유들의 중심으로 강학계를 수계(修契)하여 서원의 옛터에 강만 다시 중건하여 고산서당이라 편액하였고 1964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황나무에도 딱다구리가 두개 구멍을 팠는데 마치 선비가 두건을 쓰고 서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 서당건물은 2자 높이의 기단위에 세운 정면4칸, 측면2칸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3량가(樑架)로 막돌 덤벙 주초위에 정면 가운데 1주(柱)만 두리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으 세운 간결한 민도리집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작은 규모의 소박한 교육공간으로 재건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고산서당 뒷편 언덕에서 모습: 초례봉이 정면으로 보이고, 때 마침 동대구행 기차가 지나고 있다.
퇴계, 우복선생 강학유허비
정면에서 보이는 이황나무: 주변 야산자락 숲과 자연경관이 잘어울린다.
정경세나무 밑둥이 장고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것 같다.
이황나무 밑둥이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쓴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