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의 '능소화 연가'
이해인의 '능소화 연가'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7.11 16:51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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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2 도봉사
2018-07-22 도봉사

 

이해인의 '능소화 연가'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시집 『사랑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분도출판사. 2004-08-01

 

주황색이 본래 저토록 고왔던가. 능소화로 인해 진가를 발휘한다. 누구를 유혹하고 싶은지,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지,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지, 목을 빼들고 나팔을 불어댄다. 반응하지 않는 담벼락을 끌어안고 호소하는 꽃의 자세가 처연하다. 헤아릴 수 없는 높이를 더듬어가며 피는 꽃, 혼자는 외로워서 숭얼숭얼 무리지어 핀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더는 허락된 공간이 없건만 우주의 속살을 만져보려는 듯 직진을 감행한다. 넋을 놓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허공 속으로 맨발을 내딛는다. 능소화凌霄花는 업신여길 능凌, 하늘 소霄, 꽃 화花자를 쓴다. 직역하면 하늘을 업신여긴다가 된다. 담대한 이름과 꽃의 이미지가 아이러니하다.

칠팔월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게 능소화다. 나는 이 꽃을 보기 위해 애써 찾아가는 곳이 있다. 학이 노닐었다는 유학산 자락, 그 중턱에 자리 잡은 도봉사란 작은 절이다. 깎아 세운 듯 가파른 벼랑을 갈퀴손으로 기어오르며 피는 꽃을 보고서야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구나, 인정한다. 뿌리 닮은 줄기 사이사이 필사적으로 매단 꽃송이를 세어가며 올려다보노라면 내 눈이 아찔해진다. 무모한 용기가 부럽다. 절벽을 붙든 넝쿨의 안간힘이 꽃을 응원하는 에너지이리라. 행운과 비운의 거리는 얼마일까.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성은을 입은 궁녀 소화가 왕을 기다리다 상사병으로 죽어서 꽃으로 피었다는 전설 때문에 더 처절히 보인다.

아무래도 시인이라는 인식보다 종교인으로서 더 유명한 분이다. 독자들에게 특유의 잔잔한 위로와 따뜻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난해한 포즈 대신 대중을 위한 기도처럼 쉽게 읽혀서 접근성이 용이하다. 이것이 시인의 큰 장점이자 미덕이라 할 수 있다. 독자층이 두꺼운 이유가 소박하고 순수한 언어들을 활용하는 까닭이다. 이 시도 에두르지 않고 간절함만을 담았다.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 가지를 뻗은 그리움’, ‘당신의 눈길 하나가 기도’, ‘전 생애를 건 사랑’, 등의 시행에서 궁녀 소화가 겹친다. 이는 나의 선입견이고 본질을 왜곡한 오독일 것이다. 세 번씩 호명된 ‘당신’이란 시어는 마음속 기도가 그리움으로 승화된 사랑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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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호 2019-07-15 11:46:36
종교적인 시정이 조금 편하지 못하지만 능소화의 이미지가 진주황색에 스며듭니다. 능소화처럼 무더운 여름에 그토록 절실한 게 무엇인지 늘 되돌아봅니다. 10년 전 파리 (지금은 불탄) 노트르담 성당 뒷뜰에서 프랑스 능소화를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던 적이 있습니다. 색깔은 암주황이었고, 꽃잎이 길었습니다. 가끔 어딘가 붙잡을 것이 없어서 땅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을 보고 아쉬워합니다.
우리 사람도 무언가 기대어 붙잡을 존재가 필요하다고 능소화가 전해 주는듯 합니다.

무철 2019-07-12 12:22:46
삶과 고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시심(詩心) 가득 담긴 이해인 수녀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조금 전 곱던 그 모습으로 툭 떨어지는 능소화에서도
또한 많은 것을 읽고 갑니다.

김만태 2019-07-12 08:24:14
김기자님의 시 해설이 연둣빛 잎이 됩니다.
주황색 꽃이 주홍색으로 보이는 건
꽃을 꽃이게 하는 잎사귀 때문일꺼란
생각.

호박넝쿨 2019-07-11 21:22:05
이해인 시 반가웠어요.
저번에 시집을 읽었어요^^
능소화 연가 즐감했습니다♡

이지희 2019-07-11 20:27:31
절벽에 핀 것들 보면 멋있더라구요
침묵 속에도 불타는 눈길이란 표현이 멋집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