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15)
녹슨 철모 (15)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7.08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촌 강다방에서 태원이 유 소위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화장도 않고 옷도 아무 바지나 걸치고 생머리를 뒤로 적당히 모아 고무줄로 묶고 왔는데도 호감이 갔다. 말도 남자같이 하였다. 그러나 웃을 때나 쳐다볼 때는 영락없이 귀여운 여자였다. 오늘은 화제가 좀 달라진 탓인지 우 대위가 할 말이 많아졌다. 유 소위의 연출 덕일 가능성이 컸다.

"전 토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나오는 드미트리 같은 남자에게 호감이 가요. 미친 듯한 정열이랄까 혹은 기괴함, 전 남자들의 그런 게 좋더라고요.“ 

그 소리에 태원은 약간 자신을 얻었다. 과거 그 책을 읽으며 그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유 소위가 나도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또 말했다.

"저도 언젠가는 소설을 한번 쓰고 싶어요. 진한 연애소설을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우 대위가 되물었다.

“저의 고향이 산골이에요.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랐어요. 위로 빼꼼히 하늘이 보였어요. 오빠는 진작에 도시로 유학 가서 과수원에 일할 사람이 없었지요. 저는 일을 참 많이 했어요. 만날 학교 갔다 오면 농사일을 거들었죠.”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우 대위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외모에서는 전혀 그런 시절을 연상케 하는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을 땐 높은 산에 자주 올라가 구름을 보고 놀았어요. 구름이 저의 장난감이었죠. 구름으로 온갖 것을 다 만들고 놀았죠. 구름은 저의 애완동물도 되고 또 귀여운 인형도 되곤 했어요. 농촌 일하는 게 귀찮고 무척 힘이 들었어요. 그럴수록 구름은 저의 친구이자 오아시스가 된 거예요. 그러다가 어떨 땐 풀밭을 달려요. 한참 땀 흘려 뛰노느라면 모든 게 잊혀요. 그래서 요즘도 힘들 때면 구름과 초원을 생각하면 시름이 다 풀린답니다.” 

우 대위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것이 마치 무슨 동화처럼 들릴 뿐, 실제의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커서도 아직 저는 꿈속에 사는 소녀 같아요. 자라면서 책도 좀 보았는데 저도 한 번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고 싶더라고요. 이제는 저의 어린 시절 공상과 꿈을 소설로 한번 쓰고 싶어요.”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었다. 우 대위는 ’스위스 소녀 하이디’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그녀의 소설이 완성되면 그런 종류이겠지 하고 얼핏 생각해보았다.

"이젠 실장님 이야기도 한 번 해보세요." 

그녀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 큰 눈을 태원에게 고정시킨 채 화제를 넘겼다.

 

우 대위는 고향 이야기라면 할 말을 잊는다. 그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가옥 다다미방에서 출생하였다. 돈이 없어 온돌을 놓지 못하고 살았던 탓에 겨울에는 추워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자랐다. 해방되면서 자신이 일본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구별 안 되는 혼동 속에서 자랐다. 어릴 때 동네 애들 이름은 대개가 일본식이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졌다. 다행히 그의 고향이 대구인지라 피란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온통 전쟁뿐이었다. 동네의 구석구석은 피란민들의 판잣집이 비집고 들어서고 하늘은 각종 비행기들로 가득찼다. 땅에는 온갖 나라에서 온 군인과 군용 자동차 그리고 꿀꿀이죽과 양공주들 그런 것밖에 보고 들은 것이 없다. 지금 생각해봐도 무슨 희망이나 꿈같은 것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미군에게 징발당하여 학생들은 3년 동안 야외에서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였다. 집에서는 판사가 되어야 한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 하고 갈 길을 미리 정해주었다. 이렇게 자란 탓에 고향산천이란 말도 이상하게 느껴지고 희망이니 꿈이니 하는 말은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 소리였다. 하긴 목표는 있었다. 여느 도시 아이들처럼 항상 일등하고 일류학교에 가는 것이 그가 가져야 할 목표였다. 아니 그 부모의 목표였다.

“나는 일본인들의 관사 촌에서 태어나 골목길에서 깡통 차기, 가이센, 소타기, 말타기 놀이하며 자랐어요. 극장이나 미군 부대에 몰래 들어가는 ‘모험 놀이’도 하고요. 전쟁이 나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꿀꿀이죽이나 비스킷, 초콜릿 등 씨 레이션에 든 간식을 먹으며 살아온 탓에 유 소위와 나는 같은 한국 사람이면서도 딴 나라 사람처럼 살아온 느낌이 드네요. 사실 난 꿈도 없었어요. 하지만 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살았죠. 책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오락이었죠.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소설을 한번 쓰고 싶긴 해요. 하지만 소질이 있어야 말이죠.” 

대충 고향 이야기를 얼버무리자 유 소위가 물었다.

“그럼 잊혀지지 않는 소설은 어떤 게 있어요?" 

어색한 장면이다. 장교들끼리 다방에 앉아 생뚱맞게 고향 이야기, 문학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마치 대학교 때 하숙방이나 문학 서클 모임방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우 대위는 대학 때 가끔 여학생들을 만나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면 그런 진지한 게 싫었다. 슬그머니 자리를 뜨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여 분위기를 깨곤 했는데 오늘 유 소위를 만나서는 그런대로 잘도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도 유 소위처럼 '토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선 최고의 애정을 갖고 있죠. 그리고 허만 멜빌의 ‘백경'이나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도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소설이지요. 전쟁 때나 그 후 육군중앙극장에서 미국 서부영화를 많이 보았어요. 거기에 나오는 존 웨인이나 앨런 낫트, 버트 랜카스터같은 근육질의 용감한 남자들이 그렇게 좋더군요. 적에겐 용맹스런 남자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애정 표현도 못하고 떠나가는 애절한 그 모습이 가슴을 에듯 감동적이었어요. 소설도 자연 이런 식의 것을 좋아하게 되었죠. 나는 한국인이면서도 일본 집에서 태어나 살며 미국식 사고와 음식 속에서 성장한 국적 불명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어요.”

이야기가 깊어져 갈수록 우 대위와 유 소위는 그들의 성장 배경이나 환경이 너무 다름을 느낀다. 좁은 나라에 살았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너무도 이질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둘의 성격에는 유사한 점이 많고 또 추구하는 목표도 비슷하다는, 이상하게 닮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느끼고 있었다.

 

우 대위가 모처럼 나를 찾아왔다. 가끔 병원에는 오는 눈치인데 그동안 나에게는 잘 찾아오지를 않았다.

"야, 요즘은 좀 살 만해?" 

내가 빈정대듯 물었다.

“웬걸요. 계속 그래요.”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의 말투가 어쩐지 좀 심드렁하게 느껴졌다.

“소문 들으니 군단장실도 매일 가고 헌병 대장하고 보안 대장하고도 친해졌다던데?" 

얼핏 들은 소문을 다시 물어보았다.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분창장은 여전히 숏 테이지를 요구하며 약을 안 주고, 참모장은 악을 쓰고, 참모들은 으르렁거리니 고생은 여전하지요.“ 

우 대위는 성격이 단순하여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보통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상기되는 편인데 오늘은 오히려 차분하였다. 나는 우 대위가 겉보기에 꽤 적응해간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이상하게 속으로는 더 고통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함께 대학 다닐 때 생각이 났다. 1965년은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전국의 대학이 온통 소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있었다. 나는 의사시험이 코앞에 닥쳐서 지금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상륙을 한다 해도 국가고시 외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데모가 본업이라도 되는 듯 자주 그런 패거리들과 어울렸다. 교수들은 녀석이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그런다며 그를 '골칫덩어리' 라거나 ‘트러블 메이커' 라고 불렀다. 교수들의 그런 비난도 전혀 엉뚱한 소리는 아니었다. 교수들이 그를 종로경찰서에서 한 번, 중부경찰서에서 한 번씩 빼내 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학교로 불려온 적도 있었다. 그때 이야기를 우태원이 나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내가 중부경찰서에 갔던 날 기억하시죠? 그날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고요. 우리 학교가 시청 앞까지 진출했으니 말이죠. 정말 신나는 일이었죠. 청와대가 바로 앞인데.” 

학교가 명동에 있었으니 시청은 지척 간이었다. 오전 데모 때는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 병력이 명동성당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바람에 구호만 외치다 말았다. 오후가 되자 경찰에서는 의과대학생들이 뭘 하겠어? 하며 자진해서 해산해버렸다. 그 덕에 우태원들은 시청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 며칠 있었는데 의과대학생이라 검찰로 보내지 않고 특별히 봐준다며 서장이 생색을 낸 거죠. 더 일찍 나올 수 있었는데 일이 꼬이더군요. 서장 이야기가 ”너희는 의과대학생들이니 무슨 철학이 있겠으며 무슨 특별한 동기가 있겠어? 남들이 하니까 그냥 한 번 따라 해본 거지. 다 이해하니까 간단히 반성문이나 쓰고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처음에는 모욕을 당한 기분이라 화가 났지만 계속 철창 속에 앉았노라니 너무 답답하기도 하고 또 딴 놈들은 편히 집에서 잘 텐데 나도 차라리 그거나 쓰고 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반성문을 어떻게 써요. 또 반성할 일도 아니고....”

"그런데 어떻게 나오게 되었어?"

“학장이 왔어요. 처음에 우리 보고 다짜고짜 큰 소리로 욕하고 꾸중하길래 나도 욕이 나왔는데 나중에 보니까 일부러 그렇게 화를 낸 거더라고요. 학장이 우릴 책임진다는 서약서를 써준 뒤 석방된 거죠.” 

우태원은 그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표현했는데 자랑삼아 하는 무용담 같지는 않았다.

“근데 말이죠. 간호과 애들이 고맙더군요. 식빵과 음료수를 차입해준 거예요. 별것도 아닌데 너무 고마웠어요.”

우태원은 여자, 특히 간호과 여학생이라면 깔보고 멸시하는 이상한 태도가 있었다. 이런 그가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녀석이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부경찰서에서 석방되어 나오는데 마당에는 가족들이 나와 있더군요. 저는 누가 올 사람이 있어야죠. 그래서 슬그머니 경찰서 뒷문으로 나왔지요. 순경 한 사람이 ‘학생! 가족들이 저기 있어.' 하면서 앞마당을 가리키더군요. 나는 어쩐지 서럽고 화가 나서 ’남이야 어디로 가든 이젠 당신들이 탓할 건 아니잖아?‘ 하고 괜한 심술을 부리고 굳이 뒷문으로 나왔죠. 솔직히 고독하고 서럽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세상살이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가 갑자기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