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팩트’를 아세요?
(20) ‘팩트’를 아세요?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07.01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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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무기보다 강하다! 고 했으나,
‘팩트(fact)’ 라는 '말의 광풍(狂風)'은 핵폭탄처럼 세상을 일시에 초토화 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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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말로 '사실(事實)'이라 하지 않고, '팩트'라는 단어를 연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현상은 언론학계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매스컴에 흘러나와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2002년 <네이버>에서 한일 양국 네티즌의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야심차게 시작했던 사이트 <인조이재팬>에서 2007년부터 시작되어 널리 확산되었다고도 한다. 그 당시 한국 인터넷 토론 문화에서는 근거 자료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인조이재팬>의 한국인 이용자는 10대 중고등학생이 주류였고, 게시판에서 근거 없는 주장을 많이 했다. 이에 대해 일본인들이 'fact'를 가져오라는 댓글을 자주 달았는데, 이것이 퍼지면서 2010년 경 부터 인터넷 토론문화에 '팩트'라는 단어가 일상화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위 '난사람'인 척하는 한국인들이 ‘팩트’라고 말할 때, 윗입술과 아랫니 사이로 발음되는 ‘순치음(脣齒音)’ fact가 아니라, 상하 입술 소리(兩脣音) pact(조약, 협정)로 발음해 버린다. 그러다 보니, 자랑스럽게 ‘팩트’라고 내뿜지만, 실은 fact(사실)가 아니라. pact(조약‘)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참으로 묘한 아이러니(irony), 즉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결과가 된다.

‘팩트를 아세요?’ 이 질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어서 애매(曖昧)하다. 영국의 평론가이며 시인이었던 윌리엄 엠프슨(William Empson,1906∼1984)이 1930년에 《애매성의 일곱 가지 유형, The Seven Types of Ambiguity》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여기서 말의 애매성은 ①단어 또는 문장의 다의성, ②동음이의어의 가변적 의미, ③직유의 불명확성, ④문장의 논리적 모순성 ⑤글쓴이의 심리 상황, 등이 복잡하게 얽히는 데서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다의성에서 생기는 애매성이 시(詩)에서는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로부터 문학 작품 자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신비평(New Criticism) 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언어의 ‘애매성’은 언어가 본래 가지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이다. 산문보다 운문에서 애매성이 고도화되어 보다 깊고 다양한 의미가 들어있다. 압축된 시어(詩語)는 간결하면서 애매하지만 풍부한 의미를 가진다. 어떤 시어는 핵심적인 의미와 풍부한 암시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둘 이상의 의미를 다 수용하는 융통성 있는 문맥을 형성하여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팩트를 아세요?’ 질문을 다시 살펴보자. 먼저 팩트(fact)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아느냐 라는 문장이다. ‘사실(事實)’은 ①허구(虛構, fiction)의 반대말, 즉 ‘문학작품 등에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실’이라는 뜻이다. ②언론에 소개된 어떤 (개인적인) 주장이나 의견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있었던) 일(사실)’임을 의미한다. ‘사실대로 말해라!’라고 독촉할 때와 같이 ‘거짓말 하지 말고 진실을 고하라.’는 뜻도 들어있다. 둘째로, ‘(어떤 사건의) 팩트를 아세요?’처럼, 팩트 앞에 생략된 말, ‘어떤 일(사건)’을 넣으면, ‘그 일(사건)의 그 진실을 아세요?’ 라는 문장이 된다. 해당 사건(일)에 무엇인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풀이 되는 다의성을 가지고 있다.

가짜뉴스가 많은 이 시대에 ‘팩트를 아세요?’라는 질문이 중요한 것은 ‘사실을 위장한 거짓’이 진실처럼 도처에 난무하기 때문이다. 거짓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조작한 ‘사실’은 말의 신기루(蜃氣樓)이다. 상대편을 속이기 위한 허황하고 어리석은 망상이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 신기루의 허상을 향해 돌진한다. 쇠고기 파동처럼 광장을 밝히는 촛불도 신기루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가짜뉴스 시대에 살면서 ‘사실 검증(fact check)’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을 검증하는 방법이 간단하지 않고,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 놋그릇의 뚜껑을 열어서 그 속에 담겨진 음식을 확인해 보는 것처럼 사실검증이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년 전에 ‘아무개가 국정을 농단했다!’라는 사실(?)이 매스컴을 장악했다. 그 진위를 검증할 틈도 빠르게 온 나라가 뒤집혔다. 펜은 무기보다 강하다! 고 했으나, ‘팩트(fact)’ 라는 '말의 광풍(狂風)'은 핵폭탄처럼 세상을 일시에 초토화 시킬 수 있다. 그래서 '팩트를 아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