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파독 간호사 김숙화 씨를 만나다③
[마이라이프] 파독 간호사 김숙화 씨를 만나다③
  • 장기성,강효금 기자
  • 승인 2019.06.26 14:3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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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인 노릇은 독일 간호사의 기본이며, 시체닦이도 해봤다.
독일인과 결혼, 부모님의 반대로 불효 경험하다
1975년 신생아실에 근무할 때 막 태어난 아기의 부모가 찍어준 사진이다. 생명탄생 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오묘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김숙화씨 제공
1975년 신생아실에 근무할 때 막 태어난 아기의 부모가 찍어준 사진이다. 생명탄생 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오묘하고 신비롭기만 했다. 김숙화씨 제공

 

-파독 간호사들의 송금이 우리나라 경제개발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독일 현지에서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간호사를 포함한 파독 근로자들이 1960-70대의 어려웠던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었고 들었습니다. 경제 개발을 위해 한 푼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기에 파독 근로자들이 고국에 보낸 외화가 가뭄에 단비 같은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파독 근로자들이 마르크(DM)로 고국으로 송금하면, 그 외화는 일차적으로 국가 경제 개발의 자금으로 사용되었고, 국내 가족에겐 원화로 환전되어 어려운 가계에 단비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독일체류 중에 고국으로 얼마동안 외화를 송금했습니까? 사적인 질문이 될 것 같기도 한데요. 정말 궁금합니다.

▶1974년부터 1993년까지 보냈으니 햇수로는 꼭 19년간입니다. 이 정도면 애국자요 효녀 반열에 넣어도 손색이 없지 않습니까?(웃음) 저의 남편이 만약 한국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독일에선 맞벌이 부부의 경우 월급 가운데 필수로 공유해야하는 금액이 별도로 있고요, 또 각자가 자율적으로 쓰는 금액이 대개 따로 있습니다. 저는 자율적 경비를 거의 한국으로 송금했습니다. 독일에 살고 있는 한국 부부의 경우는 대체로 모든 경비를 필수로 공유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송금기간 동안 취미생활이나 여행도 자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 간호사는 병원에서 간병인 노릇도 해야 한다는데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간병인 노릇 합니다. 환자로 병원에 입원하더라도 간병인을 따로 고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과는 다릅니다. 간호사들이 모든 걸 다 해야 합니다. 그러니 한국간호사에 비하면 힘든 직업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파독 광부 덕수와 파독 간호사 영자의 사랑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덕수는 비자기간이 완료되자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덕수는 영자에게 ‘시체닦이’ 그만하고 한국으로 들어가자고 채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진짜 시체 닦는 일도 해봤습니까?

▶예, 저는 신생아실과 신경외과에서 근무했는데, 43년이란 긴 기간 동안 딱 3번 시체 닦는 일을 해봤습니다. 정말 두렵고 떨렸습니다. 저는 간호사로서 해야 하는 모든 걸, A부터 Z까지 다 해 본거죠.

 

-당시 파독 광부의 90%는 기혼자인 반면에, 파독 간호사의 80%는 미혼이라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통계를 본적이 있습니다. 독일인과 결혼을 했다던데요, 어떻게 만났습니까?

▶병원동료의 생일파티에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봤을 땐 아무런 호감도 느낌도 없었습니다. 그땐 사랑이 뭔지도 잘 몰랐으니까요.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대시하면서 넘어가고 말았죠(웃음). 지금 이 글을 남편이 읽는다면 아마도 정반대라고 말할 겁니다. 사실 그는 처음 만날 때부터 제 의견을 존중하고 잘 들어줬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는 저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게다가 취미도 비슷했습니다. 오직 단점이라면 흡연자였습니다. 사실 단점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00% 완벽한 사람은 신 밖에 없을 테니까요(웃음).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사교 댄스장(Disco)에서 함께 춤을 추었는데 그게 결정적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 후에 극장, 커피솝, 호숫가로 같이 데이트를 하다 보니 정이 들게 되었고, 정이 드니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니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인연이란 게 운명처럼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43년동안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1987년부터 2017년 정년까지 근무했던 'Leopoldina Krankenhaus'병원 정경이다.   Yahoo 독일 제공
독일에서 43년동안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1987년부터 2017년 정년까지 근무했던 'Leopoldina Krankenhaus'병원 정경이다. Yahoo 독일 제공

 

-독일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부모님께 처음 알렸을 때 흔쾌히 동의했습니까?

▶반대를 처음부터 예상했습니다. 혼인신고에 관련된 한국서류가 필요하면, 병원을 바꾸는데 호적등본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지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많이 두렵기도 했지만 사랑에 빠지니 이성적(理性的) 판단보다는 이성적(異性的)감정이 앞서더라고요.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 그런 심정 말이죠. 그 땐 불효란 생각도 들지 않더라고요. 독일에선 보통 성당이나 교회에서 결혼식을 거행하는데 저는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부모님 참석 없는 식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에서 혼인신고 절차를 모두 마치고나서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습니다. 한 달 후에 답장이 왔는데요, 답장이 오기까지는 몇 날 며칠 좌불안석이었습니다. 피를 말렸습니다. 그런데 기다린 보람도 없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답장을 보니, 편지지 행간마다 부모님의 노기가 흘려 넘쳤습니다. 글씨체가 턱없이 크고 흘려 썼더라고요. 단도직입적으로 아버지께서는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다. 살아서도 독일서 살고, 죽어서도 독일서 죽어라" 고 썼습니다. 당시 어떤 논리나 현실 상황으로 부모님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이런 결과가 밀어닥치니 황망하고 패닉상태에 빠져버렸지요. 천하에 고아가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답장하는 것도 포기했습니다. 시간이 약이란 심정으로 버텼습니다. 자고로 자식 이기는 부모 없잖습니까? 어언 2년 8개월이 지난 후 첫째 딸을 낳고나서 위험을 무릅쓰고 부모님께, 길고 긴 자초지종의 사과편지를 또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그제서야 승낙 하면서 손녀를 데리고 한국에 다녀가라고 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고아 신세에서 다시 부모님의 자식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자녀는 몇 명입니까. 그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어떤 점이 가장 불편하다고 했나요?

▶딸 둘입니다. 방바닥에 양반자세로 앉는 것을 가장 불편해 했습니다. 기댈 수 있는 의자나 벽이 없으면 곧장 힘들어 했으니까요. 저도 지금은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한국에선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 언어도 불편해하더군요.

 

-독일에 45년간 생활했으니 한국문화를 제3자 입장에서 객관적 볼 수 있는 관점도 나름 생겼으리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단점이나 고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한국 사람은 남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패션을 비롯한 유행 따라하기가 겁날 정도로 심합니다. 배꼽티가 유행하면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쪽으로 따라가거든요, 쫄대 바지가 유행하면 무조건 그쪽으로 따라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개성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경우 하얀 피부에 너무 매몰되어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햇볕 피하기가 대표적입니다. 눈만 드러내 놓는 마스크 차림 말이지요. 독일에선 외모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광욕이 보편화되어 있지요. 선탠(suntan)한 피부를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획일화된 문화는 왠지 안정감이 떨어지거든요. 자동차의 색상도 그렇습니다. 검정색 아니면 흰색이 많지 않습니까. 다양성이 있어야 그 문화의 뿌리가 튼튼하고 단단해 지거든요.

그리고 주제 넘는 말이지만 지금 한국에 돈 벌러 와있는 외국 노동자들에게 좀 더 잘 대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보면 어떨 땐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6-70년대 우리나라는 필리핀보다 못 살았거든요. 그렇지만 독일인들은 우리에게 정말 잘 대우해 줬습니다. 병원에서 점심식사 할 때는 우리가 원하는 쌀밥과 나물요리 상추를 따로 챙겨줬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 노동자들에게도 그 나라 음식을 준비해줄 정도로 나눔과 배려가 묻어났으면 하고, 혼자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주제 넘는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4부에서는 독일이 한국보다 편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한국의 변화된 모습에는 어떤 것이 인상적인지 궁금하였다. 독일은 사회복지제도가 잘 되어있기로 세계에서 으뜸 국가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초등부터 대학까지 수업료가 없는 나라가 아니던가. 누구나 원한다면 대학원까지 수업료가 무료다. 부러움이 이는 제도이다. 그러나 복지 제도에서 독일보다 앞선 것이 한국에는 없는지도 궁금하다. 그밖에 파독 간호사 가운데 현지 독일인과 결혼한 사람은 얼마나 되며, 한국가정 생활과 다른 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제4부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