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파독 간호사 김숙화 씨를 만나다②
[마이라이프] 파독 간호사 김숙화 씨를 만나다②
  • 장기성 · 강효금 기자
  • 승인 2019.06.20 11:5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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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장벽에 울고, 김치 향수에 목메이다.
1974년부터 19년간 빠짐없이 고국에 마르크(DM) 송금하다.
1974년 독일에 처음 도착하여 근무하게된 뵈르네크 병원(Gemeinde Krankenhaus Werneck)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4년 독일에 처음 도착하여 근무하게된 뵈르네크 병원(Gemeinde Krankenhaus Werneck)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백의의 천사가 따로 없어보인다. 김숙화씨 제공

 

1965년 12월에 128명의 파독 간호사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이래로 해를 거듭할수록 수가 늘어났다. 1970년대에는 7천 명 내지 8천 명까지 이르렀다. 이들이 독일 사회에 준 인상과 화제는 폭넓었고, 그 인기는 대단하였다. 어떤 독일인들은 병원에 가면 한국 간호사가 아니면 손도 대지도 못하게 한다는 얘기도 들릴 정도였다. 동방에서 온 작은 나라 한국을 ‘성실과 친절’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백의의 천사’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60-70년대만 해도 독일에선 ‘코리아’를 동남아의 한 나라로 알고 있었고, 한국 사람은 중국어를 사용하며, 남한과 북한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베트남전쟁과 한국의 6.25를 혼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연아, 박지성, K-Pop의 BTS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파독되기 전, ‘독일’이란 나라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당시 독일은 우리에게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란 이미지와 ‘라인강의 기적’이란 상반된 이미지가 겹쳐지기도 하는 데요.

 

▶저는 독일 가기 전에 영어영문학과 학생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쓴 전혜린의 산문집을 읽게 되었는데요, 현실과는 약간 유리된 사변적(思辨的)인 주제들, 한국 땅을 벗어나 생활해 보고 싶은 열망, 여성으로서의 한계의식과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의 고민, 그리고 나이 들어감에 대한 두려움 등이 제 삶의 편린들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을 은연중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먼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표현들이 곳곳에 묻어났는데 무의식적으로 끌렸습니다. 이런 글귀에서 말이죠, “먼 곳을 향한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아무튼 먼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 말이지요. 어쨌든 학창시절에는 독일이 먼 나라의 동화처럼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당시 외국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됐지만, 초행길이고 더욱이 미혼이라 해외체류 자체만으로도 불안했겠는데요. 출국할 때 어떤 것을 준비해 갔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당시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해외여행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물 안에 개구리였죠. 당시 우리 세대들은 너나없이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모두 가난했으니까요. 출국에 따른 준비물을 챙길 땐 경황이 없었습니다. 주변에 도움을 줄 해외 유경험자도 없었고요. 그래서 우선 필요할 것 같은 것 중심으로 이것저것을 캐리어에 집어넣었습니다. 4계절 입을 수 있는 평상복을 비롯하여 잠옷, 간호사 가운, 흰 구두, 가족의 음성이 녹음된 테이프, 팝송과 유행가가 담긴 테이프, 흑백 가족사진,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맨발의 이사도라, 아다모의 ‘눈이 내린다’, 영화 러브스토리의 ‘눈 장난’, 사이먼과 가펑클의 ‘철새는 날아가고’, 비틀즈의 ‘예스터 데이’ 등이 실린 LP 음반, 목각인형, ‘지인들의 주소록’ 등을 챙겼습니다. 지금 그 순간을 떠올리자니 금세 짠해지고 한편으론 들뜨기도 하고 설레기도합니다.

 

-파독 간호사로 가기로 결정되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찬성했습니까, 아니면 반대했습니까?

 

▶저가 맏딸이라 처음 말을 꺼냈을 때부터 반대했습니다. 보수적이면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반대가 어머니보다 더 심했습니다. 한때 포기할 생각도 했습니다. 독일 체류 계약기간이 3년이었는데, ‘3년의 의미’를 부모님께 유난히 강조했습니다. 3년 후에는 꼭 돌아오겠다고 구두각서(?)를 여러 번 언약하고서야 겨우 허락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3년이 45년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껏 독일에 살고 있으니까요.

 

1966년 1월 31일 파독간호사 제1진 128명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Daum Image
1966년 1월 31일 파독간호사 제1진 128명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모두 한복을 갖춰입은 것이 이채롭고 신기하다. Daum Image

 

-독일 처음 도착해보니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향수도 있겠지만 그것 이외에 말이지요.

 

▶언어장벽이었습니다. 병원에 배속되어 근무할 때 외부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우선 겁부터 났습니다. 병원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 예약이거나 퇴실 같은 날짜나 숫자(금액)에 관련된 것이 많았거든요, 나 원 참,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우스운 얘기지만 전화가 걸려오면 일단 화장실로 피했습니다. 그땐 전화벨 소리 자체가 심장을 멈추게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도 독일어로 숫자 세는 법은 버겁습니다. 다른 하나는 음식이었습니다. 처음 독일 왔을 땐 브뢰첸(Brötchen)이라는 빵, 버터, 쨈, 소시지, 스테이크는 환상 자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 했으니까요. 영화에서 가끔씩 보긴 했지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도 물리기 시작하더군요. 특히 마늘이 들어가는 ‘김치’는 향수를 부르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마늘이 들어간 요리는 독일 사람들이 싫어하니 처음엔 어쩔 도리 없이 의식적으로 피했고 참아야했습니다. 마치 마늘 들어가는 요리가 문화인과 미개인을 가르는 잣대처럼 느껴졌거든요. 아침 식사 때 김치를 곁들어 먹고 출근하는 날에는, 독일 사람들이 그 냄새를 본능적으로 낌새채고 있다는 걸 실제로 경험했거든요. 마늘 냄새는 나를 그들과 거리두기 하게하는 장치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늘 저녁식사 때만 숨죽여가며 먹었지요. 독일에는 김치냄새를 없애는 껌 같은 약이 시판될 정도로 기피대상이었지요. 김치가 사실 무슨 죄가 있습니까!

 

-월급 받으면 고국으로 돈을 정말로 송금했나요? 당시 월급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통계에 따르면 파독 간호사의 57%가 한국에 규칙적으로 송금했고, 18%는 가정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불규칙적으로 송금했다는 통계가 있던데요.

 

▶1974년 1월부터 간호사로 근무했는데, 월급이 7백 마르크였습니다. 일 년에 단 한번 크리스마스 때는 보너스를 포함해서 특별히 1천 마르크(DM)를 받았습니다. 당시 1마르크는 한화로 145원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통상 받았던 월급 7백 마르크를 한화로 바꾸면 약 10만원 정도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대학병원 간호사의 월급이 2만5천원 정도였으니 제가 4배 정도 더 받은 셈이죠. 그 때 한국 국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3만원 정도였습니다. 외국에 가면 누굴 가리지 않고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그 대열에서 예외는 아니었나봅니다. 첫 월급을 받자마자 2월4일에 4백30마르크(DM)를 한국 부모님께 송금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요,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효녀노릇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영수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한국으로 편지를 보내면 꼬박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또 답신 오는데도 마찬가지로 일주일 걸렸습니다. 약 한달 후인 1974년 3월 7일에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보내준 돈 6만2천원을 잘 받았다고요. 아버지의 답장 속에는 3장의 편지지가 들어있었는데, 동생들의 글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고 싶다고요. 눈시울이 불거졌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떠나기로 결심한 김숙화씨, 이 결정을 처음 들었을 때 부모님의 애처로운 반대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다. 드라마가 따로 없어 보인다. 매달 받는 월급 7백 마르크 중에 61%인 430마르크를 고국으로 보낸 그가, 효녀 이전에 조국 근대화의 기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3부에서는 그가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간병인 노릇과 시체 닦는 일을 진짜로 했는지. 그리고 독일인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처음 부모님께 알렸을 때 그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흔쾌히 동의를 했는지 아니면 절대 반대하였는지를. 이런 얘기들을 제3부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