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13)
녹슨 철모 (13)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6.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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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부터 박 하사는 토끼장 부근에서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오래지 않아 박 하사가 쉽게 풀었다. 사령부의 정문과 후문은 헌병이 보초를 서고 내외곽은 경비 중대 병력이 보초를 선다. 밤이면 요소요소에서 경비 중대 병력들이 더 촘촘히 선다. 헌병들은 근무가 끝나면 사령부 건너편에 따로 있는 제 부대로 가버리지만 경비 중대 병사들은 사령부 CP 뒤에 있는 자신들의 막사로 가게 되는데 일부는 의무실 토끼장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 경비 중대 초병들이 밤에 지나다니며 토끼를 수시로 한두 마리씩 가져가는 게 박 하사의 잠복경계에서 발각된 것이다. 거의 매일 이런 식으로 잡아가니 아무리 토끼의 수가 많아도 남아 돌아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까닭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토끼장에 불침번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안 그래도 토끼 먹이 구하기도 힘들어 모두 속으로 심드렁하던 판에 결국 토끼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토끼 문제가 해결되고 나자 이제는 사람 문제가 생겼다. 그 사건의 주역은 박 하사였다. 어느 날 우 대위가 출근해보니 간밤에 박 하사가 헌병대에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 새끼는 유격장에 가 있잖아? 그런데 웬 헌병대냐?" 

우 대위가 화를 내며 물었다.

"박 하사가 무장탈영을 했어요.” 

문 상병이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야! 인마, 유격장에는 담도 울도 없는데 탈영이 무슨 말이야? 술 처먹으러 잠깐 나갔겠지. 헌병대 새끼들은 뭐 그만 일로 걸어 넣은 거야?" 

아무 죄 없는 문 상병에게 화를 내면서 우 대위가 말했다.

"근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실장님 말씀대로 탈영이야 헌병들 하고 잘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박 하사 녀석이 밤중에 유격장 부근에 있는 부대 초병을 구타하고 총을 빼앗았다는 거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 총은 어디 두고 남의 총은 왜? 그 새끼 괴뢰군이야 뭐야. 무슨 짓이야?“

”박 하사가 밤에 무단으로 유격장을 이탈하여 술을 마시고 만취하여 귀대하다 지가 갖고 나간 총을 분실했답니다. 그래서 겁이 나서 유격장 부근에 있는 부대 보초병의 총을 뺏어 도망가다가 잡혔다는군요."

위병에게 위해를 가하면 중벌이다. 전시에는 사형이다. 우 대위는 헌병대장의 안압을 측정하느라 매일 헌병대장을 만나고 있던 참이라 그에게 달려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선처를 바랐다. 용서는 있을 수 없지만 대신에 총만 찾아오면 모든 것을 없었던 걸로 해주겠다는 언질을 받았다. 단, 시간은 오전 10시까지였다. 우 대위는 전화통 옆에 앉아 있고 모든 위생병은 총을 찾으러 유격장 부근으로 흩어져 나갔다. 이건 정말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아닌가. 술 취한 놈이 어디서 총을 잃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하고 적은 병력으로 풀섶을 뒤지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헌병대에서 전화가 왔다. 시간이 다 되어가니 포기하라고, 박 하사를 작전조사계로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즉 정식으로 육본에 보고하고 구속 수사해서 군사재판에 넘기겠다는 것이다. 태원이 헌병대에 가니 아직은 의무실과의 정의를 생각해서 박 하사는 특별대우로 영창에 있지 않고 헌병 내무반에 앉아 있었다. 우 대위의 가슴은 수건으로 약을 짜는 형국으로 조여 왔다. 박 하사는 장기 하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직업군인을 자원한 사람이다. 이런 친구가 처벌받게 되면 군인 생활은 끝이다.

우 대위는 박 하사가 기왕 직업군인이 되기로 했으니 장교로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다. 막상 준비하다 보니 학력이 중학 졸업이어서 장교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규정집을 자세히 뒤져보니 학력이 낮아도 실무경력 2년 이상이면 장교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착실히 공을 들이면 1년 뒤엔 의정장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박 하사에게 태원이 느끼는 감정은 전방에서 이용웅 병장과 쌓은 우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태원이 최전방 임진강의 보병대대에서 근무할 때 이용웅 병장을 만났다. 병장이 되기 전에 상병 계급장을 달고 순환보직 관계로 1대대에서 태원의 2대대로 왔는데 그는 전입해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태원에게도 무표정한 얼굴로 만나면 경례만 하였다. 고참들이 있는데 그것도 갓 전입한 병사가 감히 군의관이나 고참들과 이러고 저러고 이야기할 형편이 못 되는 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그의 과묵한 행동에는 뭔가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여 그를 만나면 항상 답답한 심정을 느꼈다. 이 상병은 시간만 나면 열심히 책을 읽었다. 겉보기에는 독서와 먼 인상인데, 읽는 책이 몽테스키외의 ‘교육론’, 단테의 '신곡',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스탕달의 ’적과 흑' 등으로 내용도 어려운 것들이었다. 어느 날 우 중위는 그를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지대장님, 저는 의사들이나 부자들을 보면 미운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가 무겁게 입을 뗐다. 충청도 억양이라 느리기도 하였지만 이야기 내용 자체로 미뤄 그에게는 중압감이 심했던 같다.

“저의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새장가를 가더라고요. 엄마가 죽자 그렇게나 슬퍼하던 아버지가 말이에요. 저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돈이 없다는 핑계로 대학도 안 보내주더군요. 당시는 그게 다 핑계인 줄 알았습니다. 계모에게 우리 아버지가 홀딱 빠져서 그러는 줄 알았지요.” 

이야기 내용이 무거워지자 태원은 은근히 긴강이 되었다.

“그럼 이 상병을 진학 못 시킬 이유라도 있던가?

”나중에 철이 들고 보니 그게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보증을 서준 외삼촌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집에 돈이 없어 저는 대학을 못 가고 배다른 제 동생은 나중에 형편이 좋아져서 대학을 간 건데 저는 차별 대우인 줄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저는 화가 나서 아버지를 욕하며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배운 게 없어서 제약회사 배달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퇴직금은커녕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군에 오게 되었지요. 입대할 때 밀린 봉급을 요구하자 사장이 돈이 없다며 자신이 경영하다 망한 출판사 책을 한 보따리 줬어요. 저는 책 읽기를 싫어하는데 이 책이 저의 봉급이며 퇴직금인지라 내용은 몰라도 아깝고 분해서 열심히 책을 읽는 겁니다.”

“이 상병. 그러면 넌 나도 밉겠구나?" 

태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처음에는 그랬지요. 1대대에서도 순환보직으로 전출시킨다고 했지만 그쪽 군의관님이 저를 껄끄럽게 느껴 2대대로 보냈을 겁니다. 부자와 권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대대 오니 저의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더군요. 왠지 지대장님에게서는 미운 감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 나중에 다시 이야기 더 해보자. 나도 한때 그렇게 방황했던 적이 있으니까.”

면담 이후 이 병장이 표정이 있는 경례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가끔씩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기 시작하였다.

 

박 하사는 대구의 어떤 극장에서 보조 영사기사 노릇을 했는데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설쳐대다가 직장에서 쫓겨나 입대하였다. 이 상병은 사장에게 봉급을 떼이고 입대하였다. 군의관 우 대위는 데모나 하다가 군대로 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과거의 일이다. 현재는 현재일 따름이고 중요한 것은 미래이다. 박 하사는 반드시 장교가 되어야 한다. 시간은 흘러 거의 10시가 되어간다. 따르릉 하고 의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찾았어요. 총 찾았습니다.” 

이 상사의 절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빨리 그 총을 헌병대 갖다 주고 오시오.” 

이 상사에게 명령은 했지만 우 대위는 혹시 잘못 들은 보고는 아닌가 하고 한동안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어떻게 거짓말처럼 시간 맞춰 총이 발견될 수 있단 말인가.

"애들이 말이에요, 국민학교 애들이 학교 가다가 풀섶에 뭔가 반짝이는 게 있어 뒤져보니 총이었다는 거죠. 선생들이 평소에 반공교육을 잘 시켜 놓은 덕이에요.” 

역시 박 대통령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산골에서 조금이라도 거동이 수상한 자나 무기로 의심되는 물건이 보이면 바로 신고하도록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박 하사는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풀려나왔다. 이 군대는 이런 게 재미있고 멋있는 곳이다. 서로 인간관계가 좋게 형성되면 상부상조를 이렇듯 화끈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번에도 우 대위가 그들의 대장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 사건 해결에 하나로 작용했을 수 있었다. 또한 의무실 선임하사인 이 상사가 그동안 쌓아 놓은 인간관계가 한몫 해 일이 잘 풀린 셈이었다. 앞으로 언젠가는 의무실 역시 이에 상응하는 보답을 헌병대에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