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와 메토이소노
[인문의 창]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와 메토이소노
  • 장기성 기자
  • 승인 2019.06.14 15:24
  • 댓글 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0∼20대는 ‘데미안’을, 30대는 ‘위대한 개츠비’를, 50~60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가장 많이 읽는 것으로 조사됐다.

 

카잔차키스는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탐구,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대다수의 작품에서 줄거리 전개보다는 사상의 흐름을 강조했으며, 1951년과 1956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위키백과
카잔차키스는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탐구,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대다수의 작품에서 줄거리 전개보다는 사상의 흐름을 강조했으며, 1951년과 1956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위키백과

교보문고 소설전문 팟캐스트 ‘낭만서점’이 2008년 1월 1일부터 2017년 12월 31일까지 10년간 주요 10개 세계문학전집 브랜드의 판매 데이터를 분석했다.

10~20대에서 가장 사랑받은 작품은 노벨문학상 작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세계적인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데미안에서 영감받아 2집 앨범 ‘윙스’(WINGS)를 만들었다고 밝히면서 최근 젊은 층에서 더욱 사랑받고 있다.

30대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많이 구입했다. 1920년대 사치와 향락이 난무하던 미국을 배경으로 돈과 사랑, 욕망을 쫓는 개츠비의 이야기가 비슷한 또래의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2013년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돼 개봉되면서 원작 소설이 더 주목받기도 했다. 40대는 10∼20대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을 가장 많이 구입했으나, 10대 자녀를 둔 부모가 자녀를 위해 구매한 것으로 풀이됐다. 50대에서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가장 사랑받았다. 호쾌한 자유인 조르바가 펼치는 영혼의 투쟁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일탈과 자유를 꿈꾸는 중년에게 조르바가 동경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60대는 ‘그리스인 조르바’에 이어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많이 구입했다. 인생의 황혼에 깨달은 잃어버린 사랑의 허망함과 애잔함에 관해 내밀하게 써내려간 작품이다.

각 연령대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로 10~20대는 데미안의 ‘성장’에, 30대는 개츠비의 ‘욕망’에, 50~60대는 조르바의 ‘자유’에 주목한 것 같다"며, "각 작품의 주인공이 주된 독자층과 연령대가 비슷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국내에서 조르바에 대한 신드롬은 식자층에서 더 강한 흡입력을 보여주고 있다. 매스컴에 자주 나오던 명지대 김정운교수가 이 책에 감명받고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리고 홀로 외국으로 떠났다는 얘기며, 시골 의사 박경철 박사도 지난 대선 때 절친 동행자 안철수 후보 돕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에서 2-3년간 눌러 붙어 조르바의 자유에 빠졌다고 한다. 독서에 관한한 마니아로 공인되는 사람들이니, 너나없이 조르바의 ‘자유와 일탈’에 빠져드는 계기를 만드는데 한몫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리스인 조르바’가 시니어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것인데, 저자인 카잔차키스의 이력이 이 소설의 모티브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 이 글의 주된 지향점이다. 소설 속에 보여주는 자유와 일탈의 현상적 묘사에는 집착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2시간 22분짜리 영화로 더 쉽게 더 리얼하게 접근할 수 있으니. 어떤 소설도 자신의 직간접적 경험 없이는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것이 보편적 상식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저자인 카잔차키스의 개인사와 시대조류를 읽어내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그가 의도한 ‘자유’의 온전한 개념에 빠져본다는 건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선 ‘자유’와 ‘메토이소노(聖化)’의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조르바의 본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이다. 1947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출간되고, 한국어로는 1980년 이윤기에 의해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번역본 기준으로 480쪽에 이른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그리스인이다. 그러나 청년시절 그는 크레타 인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다. 그리스 본토와는 달리 이 크레타 섬은 그가 태어날 당시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터키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참담한 피난 생활을 경험하고 사춘기에 이른 그는, 자유와 해방에 대한 목마름이 누구보다 절실했다. ‘카잔차키스의 문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가파른 투쟁에서 피워낸 꽃이라 할 수 있다.

수도 아테네 법과대학에 진학하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리스 본토 순례였다. 그의 자전적 글에서 이렇게 당시를 회고한다. “여행을 끝낼 즈음, 내 눈은 그리스로 가득 찼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인식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조국 순례 여정에는 성지인 아토스(Athos) 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토스 산은, 여차하면 하산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오른 산이다. 이 산은 기암절벽으로 험한 산이며. 수도원과 수도승의 산이기도 하다.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라고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제비집처럼 붙어있는 수도승의 암자뿐이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고부터 천년 세월이 지나도록 성산 아토스는 여자가 오른 적이 없는 산이다. 여자뿐만이 아니다. 염소나 닭이며 고양이 따위의 짐승 암컷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영산(靈山)이다.

영혼은 천사의 몫이고 육신은 악마의 몫이라는 가르침에 익숙하던 그가 수도승들의 고통스러운 금욕의 공간을 목격한 것은 그 때의 일이다. 그의 아토스 산 순례기에는 이렇게 시작된다. “종신형을 살기위해 어두운 감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악마와 지옥의 불길과 뿔이 달린 지옥의 괴물 그림이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일 것이란 인상을 받았다”

카잔차키스는 이 산에서 고행을 통해 천국에 이르려는 무수한 거짓 수도승을 만난다. 그 중에는 반미치광이 수도승도 있었다. 수도원 앞의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아래에는 백골이 널려있었다. 고행을 통해 천사의 날개를 얻은 것으로 믿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미치광이 수도승의 백골이다.

그는 이 산에서 ‘동굴의 마카리오스’를 만난다. ‘동굴의 마카리오스’는 수도승 가운데서도 거룩함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 ‘성인(聖人)’이다. 그가 아토스 산에서 만난 마카리오스는 육체를 악마와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영혼주의자라면, 역시 아토스 산 기슭에서 만난 한 파계승은 극단적인 육체 지상주의자였다. 거드름을 피우던 마카리오스와 달리 파계승은 청년 카잔차키스에게 고해하듯이 이런 고백을 했다.

“내 나이 벌써 예순인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수도승이 되었지요. 그로부터 20년 동안 아토스 산 수도원에서 하나님 말씀만 묵상했어요. 태어난 뒤로 한 번도 여자를 가까이해 본 적이 없으니, 여자에 대한 열망으로 괴로워할 일이 있었을 리 없지요. 날이면 날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땅바닥을 짚고 기도를 했지만 하나님은 내 앞에 나타나 주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절망한 나머지 하나님께 간구했지요. '하나님,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이 무슨 수로 하나님을 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만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이승 것이든 천국의 것이든 구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하시어, 제가 기독교인 된 보람을 느끼게 해주시고, 아토스 산에서 보낸 세월이 헛된 세월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울고불고 금식해도 소용이 없어서요. 악마가 내 마음을 잠그고 열쇠를 감추어 버렸나 봐요. 그런 헛된 세월을 보낸 후에 살로니카(Salonika)로 파견된 뒤에,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 줄을 알면서도 나는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답니다. 아, 그 여자와 동침하는 날 밤, 나는 평생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가 부활하고 있다는, 기가 막힌 느낌을 경험했답니다. 육신이 쾌락의 절정을 누리는 순간, 하나님이 두 팔을 벌리고 내게 다가오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그날 밤 난생 처음으로 날이 밝아오기까지 감사 기도를 드렸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기쁨을 모르는 인간, 기뻐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어요. 나는 단식이나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뵙고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40년 전의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죄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속죄하라고요? 나는 안 해요. 내게는 뉘우칠 게 없어요.“

‘마카리오스 성인’의 가르침과는 사뭇 다른, 그 파계승의 고해를 듣는 순간은 청년 카잔차키스가 새로운 십계명을 찾아 긴 여정에 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십계명이 필요했다. 훗날 이것이 ‘메토이소노’로 승화되지만.

1908년 카잔차키스는 생(生)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만난다. 그가 베르그송에게 빠진 것은, 인간 존재란 신이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예감을 베르그송의 생철학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인연을 끊고 ‘삶’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기로 마음먹은 호전적인 청년에겐 이 만남은 충격적인 시대흐름의 한 체험이 되었다. 카잔차키스의 정신적 모태를 이룬 또 다른 한명의 철학자는 니체였다.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쓰고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우리를 심연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인간은 마땅히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나의 초인(超人)이 되어야한다. 신의 빈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야한다. 주인의 명령이 없어진 지금, 우리의 의지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하는 것이다“ 베르그송과 니체의 만남에서 얻은 영감은 결국 자신의 문학에 고스란히 옮겨 놓고 만다.

카잔차키스의 이름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며,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聖化)’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상태(臨界狀態)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것이 ‘메토이소노’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전적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업이 거덜난 날, 세상에 거칠 것이 없는 자유인 조르바는 바닷가에서 춤을 추었고, 나는 그 조르바의 모습을 마음에 새겼다. 보라, 조르바는 부도난 사업체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거룩하게 만들기’이다. 나는 조르바라고 하는 위대한 자유인을 겨우 책 한 권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다”

1946년부터 그리스 작가 연합은 카잔차키스와 시켈리아노스를 노벨 문학상에 추천하였고 그는 총 아홉 차례에 걸쳐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표결에 올랐을 때 그는 한 표 차이로 노벨상을 놓쳤다. 그 해의 노벨상 수상자는 알베르 카뮈였다. 카뮈는 이후 말하길, 카잔차키스가 자신보다 "수백 배는 더 이 영예를 누려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린 윌슨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였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대극(對極)을 초월한 전형적인 자유인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극히 독창적인 해석은 그리스 정교와 교황청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1954년 그리스 정교회가 ‘미할리스 대장’,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작품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이 작가를 파문한다. ‘메토이소노’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생전에 그가 마련해 놓은 묘비명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