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12)
녹슨 철모 (12)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6.1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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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촌 ’강 다방' 에 유 소위와 우 대위가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하얀 유니폼을 입고 줄 그어진 캡을 썼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여전히 화장기는 없었다. 생머리는 끝만 잘라 뒤는 고무줄로 묶었다.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는데 태원에게는 그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실장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이렇게 불러 내시니...” 

짐짓 그녀가 능청을 떨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나갔다. 둘 다 사복은 입고 있지만 아직은 야전병원에서 군인들끼리 만난 분위기가 연장되고 있었다.

"에이, 유 소위도, 전에 고마웠고 뭐 또 그냥 한 번 보고 싶기도 했고... 그날 정말 감사했어요.” 

우 대위는 짐짓 심드렁한 체 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날 콜라 말씀이세요?”

“아, 정말 난 그 환자 죽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는 내가 죽는 줄 알았고요. 근데 어떻게 마치 준비나 한 듯이 음료수를 그렇게 갖고 왔어요?"

"전 실장님이 콜라를 좋아하는 줄도 다 알고 있었어요.”

“....?"

“우리 간호 장교 중에는 실장님이 여자를 무시하고 콧대가 높아 보인다며 어려워하고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전 실장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건 또 왜 그래요?"

"실장님은 깔끔한 체해도 촌놈이에요. 태도가 무뚝뚝하고 특히 여자들을 멸시하는 듯한 말투나 눈초리가 간호 장교들에겐 별 호감을 못 주죠. 하지만 저 역시 전라도 촌년이고 실장님도 경상도 촌사람이잖아요. 실장님은 다른 군의관과 다르게 밤중 응급환자 후송 때도 반드시 전투복에 군화 차림으로 오더군요. 전 그런 모습이 성실하게 보여 실장님이 좋더라고요.“

"겨우 같은 촌놈이어서 좋았다는 이야기군요.” 

태원은 짐짓 심기가 불편한 듯한 표시를 하였다.

"아이, 실장님도, 그런 정도이기만 했다면 제가 오늘 이렇게 나왔겠어요. 그리고 기타 등등으로 좋은 점이 많아요. 아 참, 그리고 생각이 나네. 얼마 전 신경외과 과장이 우리 간호 장교들하고 한판 붙은 거 알고 계세요?“ 

그녀가 재치있게 분위기를 바꾸었다. 유 소위는 이런 재주가 있었다. 그 후로도 항상 여자들만 만나면 굳어지고 말이 뒤틀리고 마는 태원에게 유 소위는 그가 말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만들어주곤 하였다.

“나도 대충 들어서 압니다만 그게 어떻게 된 거예요?" 

우 대위가 물었다.

“얼마 전 군단사령부에서 군단장님 생일 회식이 있었지요? 그날 우리 병원에서 간호 장교들이 불려갔어요. 저도 갔는데 처음 갈 때는 환자가 생긴 줄 알았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 생일잔치였어요.” 

태원은 심기가 조금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사실을 정작 사령부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태원이 궁금해서 묻자 유 소위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뭐 별일은 없었고요. 우리는 가서 꽃꽂이도 하고 노래도 불러주고, 말하자면 잔치 도우미 역할을 하고 온 거지요.”

"그런데 그게 신경외과 전 대위와 무슨 관계가 있어요?" 

우 대위가 별일 다 봤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 저도 군대 생활한 지가 오래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흔히 간호 장교들이 그런 일에 동원되나 봐요. 전 대위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한마디 했다는 거죠. ‘간호 장교 너희가 술집 색시냐’고요.”

우 대위는 전 대위의 성격을 안다.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뒷일까지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결국 병원 강당에 전 간호 장교들이 모였지요. 병원장이 주선하여 전 대위의 사과를 듣겠다고 말이죠.”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전 대위가 사과했어요?" 

우 대위가 물은 것은 그가 사과하지 않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강당에 다 모였죠. 전 대위는 사과를 하지 않았어요.”

“그럼 난리가 났겠군.”

"물론 처음에는 난리가 날 분위기였죠. 하지만 나중에는 간호 장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 꼴로 해산하고 말았어요.”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끝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의 유 소위에게서 이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매력적이었다.

"여러분, 저는 오랫동안 간호사들과 살아온 의사입니다. 우리는 잘났으나 못났으나 같은 의료인이며 한 식구입니다. 그런데 제가 군에 와서 보니 간호 장교가 높은 계급 보병들의 당번병처럼 생일날 꽃꽂이나 해주러 다니고 노래나 불러주고 소문에는 병원장을 따라가서 장군들 안마까지 해줄 때도 있다고 하더군요. 자, 이러한 말들이 사실이라고 할 때 여러분은 간호사입니까? 술집 작부입니까? 양심이 있거든 저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주위를 한 번 돌아본 뒤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간호사는 뭐니 뭐니 해도 의사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소문이 날 때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의사가 옳은 사람입니까? 욕하는 사람이 옳은 사람입니까?”

전 대위가 일장 연설을 마치자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각자 흐지부지 해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유 소위는 간호 장교이지만 아직은 국군간호학교 시절의 습성이 남아 있는 탓인지 사복을 하고 만나도 여전히 말투가 군대식이었다. 부대를 떠나 금촌으로 유 소위를 만나러 간 것은 한 여자를 만나러 온 것인데 지금 이야기의 내용에서부터 말투까지 야전병원의 한 부분을 연상케 하자 태원은 약간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녀에게 뭘 바라는지 자세히 몰랐다. 그러므로 우 대위 자신도 횡설수설하는 수밖에 없었다.

“간호 장교들은 또 그런 어려움이 또 있군요. 나도 군단사령부에 있으니까 정말 말로 다 못할 고통이 있지요. 가장 큰 고통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거죠. 아니, 말이야 아무에게나 할 수 있지만 나와 같은 감을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없다는 거지요. 간혹 사람들이 '야, 정말 고생이 많겠네' 하고 위로하지만 그건 그냥 인사치레지요.”

"사모님에게 말씀하면 잘 받아주실 수 있잖아요?" 

그녀가 거들었다.

“우리 마누라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그런 이야기는 잘 못 알아들어요. 설사 알아듣더라도 당신 성격이 괴퍅해서 그렇다거나 또는 대충 살면 될 텐데 괜히 고생을 사서 한다며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거든요.”

어떻게 이야기하다 보니 괜스레 아내를 비방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전에 병원에서 제가 결혼하셨는지 물었을 때 연애결혼하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서 어려울 때 대화가 안 된단 말이에요?" 

그녀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게도 되네요. 아마 우리 집사람은 사랑만 해주어야 할 사람인 것 같아요.”

자꾸 이야기가 우 대위의 의도와는 엇갈려 진행됐다. 두 사람의 부대 밖 처음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의무실 굴토끼들은 잘 불어나고 있었다. 놈들끼리 스스로 교미하여 식구를 불려 나갔다. 그 덕에 우 대위의 ‘위생병 단백질 섭취 향상 계획'도 차질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은 토끼 잡는 날로 고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사 무상하다고 누가 말씀하셨듯이 변하지 않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어느 땐가부터 토끼들의 수가 늘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그 수가 오히려 줄기 시작하였다.

"여기는 산중이니까 필시 산짐승들 짓일 겁니다.” 

이 상사가 아는 체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책이 뭐요?" 

우 대위가 물었다.

"우리 토끼장이 울타리만 있고 지붕이 없잖아요. 그리니까 지붕을 씌우면 될 겁니다.”

이 상사는 대단한 방안을 내놓듯 말했다. 철망을 사다가 울타리 위를 덮었다. 그래도 토끼의 수는 계속 줄어만 갔다. 위생병들은 별로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매일 토끼 먹이 뜯는 일이 고달프던 차에 잘되었다는 눈치들이었다. 그리고 거창하게 담백질 섭취 운운하지만 양념이 신통치 않으니 맛도 없고 게다가 양이 적어서 신참들은 겨우 국물만 몇 숟가락 뜨는 정도였다. 토끼장이 없어지는 것이 그들로서는 불감청 고소원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런 우 대위의 고민에 해결의 출구를 마련해주는 위생병은 항상 박 하사였다. 박 하사는 우 대위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해내었다. 전에 꽃이 핀 산벚꽃을 살려낸 주인공도 바로 박 하사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박 하사는 자다가도 일어나 산벚꽃나무를 돌보러 갔고 또 물도 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박 하사의 헌신적 사랑에 나무도 감동해 죽지 않고 살아 보답한 모양이었다. 박 하사는 원래 군단 예하 부대의 통신대대 소속이었는데 그쪽에서 다루기가 힘들다고 군단사령부로 보낸 인물이었다. 우 대위의 특징은 누군가를 만날 때 절대로 사전에 신상을 파악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그렇게 하면 선입견이 생겨 그 사람을 옳게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또 설사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성심성의껏 대해주면 일이 다 풀린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 하사는 물어보지 않아서 통신대대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모르지만 일단 사령부에 들어와서는 모든 일을 시원시원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실장님, 제가 반드시 이 원인을 알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