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소크라테스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15) 소크라테스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 김영조 기자
  • 승인 2019.06.10 14: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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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깨우치고 실천하는 것

서기전 3995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봄꽃 향기가 그윽하게 물들고 있었다. 고희를 맞은 소크라테스는 디카스테리아(dikasteria)라는 아테네 시민법정에 섰다. 당시 권력자인 아뉴토스의 사주를 받은 멜레토스가 고발한 것이다. 국가가 정한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두 가지 죄목이었다.

소크라테스   위키백과
소크라테스 위키백과

 

그러나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당시 정치 지도자들을 비난하고,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에 따르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집권세력 반대파에 소크라테스 제자가 많았다.

또한 평소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무지하다고 비판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모함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당시 아테네의 주류 지식인 집단인 소피스트(Sophist)들의 질시를 받았다. 그들과의 설전 과정에서 상대방이 대답을 못 할 때까지 질문을 던지며 면박을 주었다.

소크라테스에게 당한 사람들은 그의 못생긴 외모를 비꼬았다. 그는 이마가 벗겨지고 배가 나오고 키가 작으며, 눈은 튀어나왔고, 코는 뭉툭하고 입술은 두툼한 추남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람들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인 숲의 정령 '사티로스(Satyros)''악마'에 비유하여 비꼬았다.

그리고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거기다가 전염병이 창궐하여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였다. 시민들의 삶이 침울한 상태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패전 후 아테네의 집권자가 된 아뉴토스는 소크라테스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법정에는 500명의 시민 배심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자 중에서 기계로 추첨하여 선정된 6,000명의 예비 배심원 중에서 당일 추첨으로 선정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직접 사건을 심판을 하는 것이다. 아테네가 자랑하는 직접 민주주의 방식이다.

선거에 의하여 대표를 뽑는 간접 민주주의 또는 대의 민주주의는 주권자의 의사가 직접 반영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선거 과정에 흑색선전과 가짜뉴스가 난무하고, 뇌물과 청탁이 판을 치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선거제도는 웅변술과 변론술, 수사(修辭)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유리하다. 반대로 추첨제도는 운에 따른다. 그 운은 만인에게 공평하다. 그런 점에서는 직접 민주주의가 우수하다.

재판은 두 번 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재판은 피고인에 대한 유죄, 무죄 여부를 가리는 재판이다. 두 번째 재판은 유죄 판결이 난 피고인에 대해 형량을 정하는 재판이다. 재판에 검사나 법관, 변호사가 따로 없다. 고발인과 피고인이 각각 배심원들을 상대로 직접 변론한다. 첫 번째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로부터 만약 철학을 포기하면 석방해주겠다는 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음미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말로 거절한다.

그리고 고발인 멜레토스의 무지와 모순을 지적한 후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할 것이다. 즉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지()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변론이 끝나고 고발인과 피고인이 각각 증인을 세워 신문한 뒤 판결을 내렸다. 유죄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있는 도자기 조각을, 무죄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없는 도자기 조각을 투표함에 넣는다. 투표 결과 배심원 500명 중 유죄 280, 무죄 220표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이어 두 번째 재판이 열렸다. 당시 법에 따라 피고인은 유죄 선고 후 최후 변론에서 구류, 벌금, 추방, 침묵 강요 등 네 가지 중 하나를 요청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최후 변론에서 뉘우치거나 간청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상을 받아야 하고, 귀인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턱없이 적은 금액의 벌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배심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결과 사형 360, 벌금형 140표란 압도적 차이로 사형이 확정됐다.

그 후 친구와 제자들이 탈옥 및 망명을 권유했다. 돈 많은 친구 크리콘이 뇌물을 써서 풀려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내가 도망치면 고발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하는 꼴" 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독미나리를 먹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 자크 루이 다비드   위키백과
소크라테스의 죽음 - 자크 루이 다비드 위키백과

 

이때 그가 말했다는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플라톤의 기록에 의하면 나는 그릇된 일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복종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고 하였다. 이 말은 독재국가나 식민통치에서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한 말이다. 일본의 법학자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가 그의 저 법철학에서 이 말을 언급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가 방법을 동원하여 사형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죽음을 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배심원들에게 애걸하거나 불의와 타협해 목숨을 구걸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과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삶을 포기하더라도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이라 생각했다. 친구 크리톤의 탈옥 권유를 받고 여보게 내 부유한 친구여! 나는 철학하는 자유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내 이성의 참된 명령이네라며 사양하였다.

둘째,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진리를 증명하고 싶어 했다. 구차하게 살아서 침묵하기보다는 죽어서라도 아테네 민중들에게 진리에 대한 경각심과 깨우침을 주고자 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배심원들에게 훈계까지 하였다. “, 벌써 떠날 시간이 되었구려. 이제는 서로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 하오. 나는 기꺼이 죽으러 가야하고, 당신은 살아야 할 시간이오. 우리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만이 알고 있소.

셋째, 그는 당시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심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시민법정에서 단지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무죄를 선고하고, 돈 있고 말 잘하는 사람은 무죄이고 그렇지 못하면 유죄가 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체 시민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결정이 더 민주주의적이라며 중시했다.

넷째, 당시 시대상황이 이기주의와 금전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있었다. 이런 문란한 사회에서 더 이상 삶은 행복할 수 없고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진리나 지혜가 통할 리 없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생각하였다.

다섯째, 죽음에 대하여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참된 철학자라면 육체로부터 마땅히 해방되려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죽음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먼저, 죽음이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 모든 감각이 없어지고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을 자는 것과 같다. 그보다 더 즐거운 밤이 어디 있겠나? 다음,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길과 같은 것이다. 생전에 만났던 훌륭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죽음을 통해 귀찮은 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긴다.”

 

평소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무지(無知)의 지()이다. 겸손과 겸양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는 진리와 지혜를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설득하고 계도하였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에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이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