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11)
녹슨 철모 (11)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6.10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날씨가 맑았다가 비가 오고 바람 부는 날씨가 교대되듯 우 중위의 군단 생활도 좋은 일과 궂은 일이 뒤섞여 돌아가고 있었다. 

좋은 날이 있었다. 우 중위가 입대 1년이 되는 날이며 군단 전출 1년이 되는 날 대위로 진급하였다. 예하 부대 진급 예정 장교들이 부군단장 김태영 소장에게 신고한다고 모여 있었다. 전방 장교들이 긴장해 있는데 우 중위는 제집이므로 편안하다. 별 단 참모장과도 웃으며 이야기하는 우 중위의 모습을 딴 장교들이 부러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 고통스런 군단 생활이 이런 때는 마냥 자랑스럽다.

저녁에 본부대 장교들이 축하 회식을 해주었다. 우태원 대위는 나름대로는 술을 꽤 하는 편이었지만 군단에 와서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이곳 풍습은 술좌석에 앉으면 일단 소주부터 한 대접 마시고 난 뒤에 일이 진행되니 웬만한 주량으로는 이 회식 자리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만약 중도에 도망이라도 가게 되면 아예 사내 축에 끼워주지 않고 회식 후 몇 날 며칠 놀림감이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우태원 대위는 술 취하면 얼굴이 많이 붉어지므로 가급적 술을 피하는 편이었다. 술이 덜 깨면 다음 날 붉은 얼굴로 환자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 대위는 본부대 회식에 가면 체면 불구하고 중간에 도망을 갔다. 하지만 그날은 자신이 주인공인 만큼 그럴 수가 없었다. 계속 주는 축하 술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다가 눈을 떴다. 옆에 여자가 누워 있었다. 얼굴 돌려보니 군단 장교들이 모두 은근히 눈독을 들이고 있는 ‘승리식당' 이쁜이였다. 이쁜이는 여염집 여자 같고 귀티가 난다며 모두 좋아하는 작부였는데 ’힘의 진공 상태'라고 해야 할까? 대체로 그런 이유로 아무도 정복하지 못했다는 전설의 여인이었다. 태원은 자신이 그날의 주인공이었으므로 누군가 특별히 연결해주었겠지 하고 생각을 하였는데 자는 듯하던 그녀가 말을 하였다.

“실장님, 고마워요.” 

꿈길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

"그동안 제가 본부대 회식에 자주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저는 항상 실장님 곁에 앉고 싶었어요. 모르셨죠?”

우 대위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어제 웬 술을 그렇게 하셨어요? 딴 사람들은 실장님이 평소처럼 도망간 걸로 알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실장님이 이렇게 취한 덕에 제가 이런 행운을 잡은 거예요.” 

듣고 보니 일의 전말은 대충 이해가 갔다. 그러나 이 좁은 동네에 이렇게 행운과 위험이 함께 깃든 일이 생기다니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엄습하였다. 달콤한 그녀의 고백도 좋았지만 내일이 무서워 우 대위는 다리를 붙잡는 이쁜이를 밀치고 군화를 신었다.

 

어느 날 오전 나이 든 소령이 나타났다.

"나 감찰부에 있는 이 소령이오. 당신이 의무실장이요?“ 

쫙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태원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다. 일단 무능한 군의관으로 지적되어 그것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다음 문책이 있을 것이다. 약품과 의료용품이 항상 모자라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였고 높은 사람들에게 상납도 못해 질책만 받았으니 죄가 크다. 징계부터 시작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리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군의관 후보생 때 생각이 퍼뜩 회상되었다. 훈련 후반부터는 자율지휘를 한다고 해서 후보생 중에 지휘관을 뽑아 부대를 운영하였는데 이때 우 대위는 소대장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교관들이 하도 혹독하게 구니까 소대원들이 우발적으로 점심시간에 식사와 오후 훈련을 거부한 적이 있다. 우 대위와 무관한 일이었는데도 일단은 소대장이 그렇게 지휘를 한 탓이라며 몇 날 며칠 불려 다니고 밤에도 교관들의 방에 불려가 심문을 받은 기억이 났다. 남한 산성(육군형무소)으로 가든가 아니면 사병으로 입대시켜 전방으로 보내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배후만 대면 모든 걸 없었던 걸로 해주겠다는 회유까지 당하는 등 온갖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컴컴한 방에 데리고 가 권총을 슬슬 만지며 그런 협박을 할 때는 무조건 모든 걸 다 시인하고 싶은 심정밖에 없었다.

과거의 짧은 경험으로도 어떤 단체에 문제가 생기면 발생의 진짜 원인은 덮어두고 희생양 하나를 정해 놓고 집요하게 그들의 목표를 위해 그를 나쁜 놈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 우 대위가 일을 쉽게 끝내자는 그들의 회유에 넘어갔더라면 결국 군법회의로 넘어갔을 것이고 군의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결과 그들이 결국 손을 들고 만 것이다. 학생 때 데모하다 경찰서로 잡혀갔을 때도 질문은 비슷했다. 배후를 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의과대학생이라며 그렇게 모질게 다루지는 않았다. 쉽게 말하면 전문 운동권이 아니니 봐준다는 식이었다. 수사기관은 쥐 잡아 놓고 놔줬다, 물다가, 나줬다 하며 놀리며 즐기는 고양이들이다.

지금은 군사정권이다. 게다가 이 부대는 서부전선을 지키는 3개 사단과 수도를 방어하는 1개 사단을 거느린 정예군단이다. 이런 부대에 감히 무슨 부정 따위가 있단 말인가? 다만 부패하거나 무능한 군의관만 있을 뿐이지. 감찰부 조사 끝나면 기소의견으로 헌병대로 이첩이 될 것이다. 그들은 뺀 칼을 그냥 칼집에 넣지는 않을 것이다. 의약품과 재료들의 유통과정에서 부정과 부실의 진실을 그들이 설사 알게 되더라도 결코 일은 진실대로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이 뻔했다. 아니 그들은 이미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도 한패들이니까 말이다. 그들의 의문은 여태껏 잘 굴러오던 군단 의무실 일이 어떤 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왜 갑자기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달라지는지? 상납도 하지 않고 혼자 다 해 먹으며 잘난 체하는 놈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번 의무실 사태는 선의로 보면 군의관의 무능 탓이요. 나쁘게 보면 그가 의료물자를 횡령한 탓일 거라고 그들은 믿을 것이고 또 각본도 그렇게 짰을 것이다. 왜 이런 추론이 가능하냐면 우 대위의 집에는 약이 하나도 없었다. 이웃 장교 부인들이 와서 보고 하는 소리가 약을 전부 벽장 같은 곳에 숨겨두어서 안 보인다고들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 대위가 전임 군의관보다 더 부패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더 교활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제가 의무실장 대위 우태원입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깍듯하게 경례를 하였다. 군단 내에서 대위는 소령 정도와는 말로 인사만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우 대위는 나름대로 원칙을 정해 상급자에게는 무조건 규정대로 격식을 갖추었다.

“아, 당신이 바로 우태원 대위로군. 내가 말이요, 이래 뵈도 군대 생활이 20년 가까이 되었어요.”

갑자기 웬 존댓말일까? 우 대위는 무척 의아스러웠지만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감찰부에서 사병들 소원 수리해보면 군의관 욕하거나 의무실 비방하는 이야기는 항상 나오는데 최근 몇 달 동안 우리 부대 소원 수리에서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었단 말이오.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어요. 내가 하도 신기해서 그 군의관이 누군가 한 번 보러 와본 거요.” 

늙은 소령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우 대위의 손을 잡고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지금처럼 그렇게 근무 잘해주시오.” 

격려와 덕담을 덧붙이며 그는 떠나갔다.

우 대위는 두 주먹을 하늘에 대고 크게 흔들며 ‘내가 이겼다. 사병들이 나를 승리로 이끌었다. 정의는 승리한다' 를 외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고 벌렁벌렁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