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의 '두 개의 꽃나무'
이성복의 '두 개의 꽃나무'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6.07 08:41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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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동화사
2019-06-02 동화사에서

 

이성복의 ‘두 개의 꽃나무’

 

당신의 정원에 두 개의 꽃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잎이 예뻤고 다른 하나는 가지가 탐스러웠습니다

 

당신은 두 개의 꽃나무 앞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보고

그 중 하나는 가져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두 개의 꽃나무 다 갖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뜰에

심고 다른 하나는 문 앞에 두고 싶었습니다

 

내 다 가져가면 당신의 정원이 헐벗을 줄 알면서도,

허전한 당신 병드실 줄을 알면서도……

 

당신의 정원에 두 개의, 꽃나무가 있었습니다 두 개의

꽃나무 사이, 당신은 쓸쓸히 웃고만 계셨습니다

 

시집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06-01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른다.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사람이 적게 지나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 마지막 부분이 인상 깊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오래 전에 나온 광고 카피가 요즘도 경구처럼 쓰이고 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하는 순간에 처한다면 고민이 필수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덜 실패하기 위해서 즉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 이미 많은 이들이 앞서 걸어간 방식을 답습하며 살아간다. 웬만큼 모험심이 투철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목표를 향한 길에 불안감이 동행하기 때문이리라.

한때 나의 정원에도 두 개의 꽃나무가 있었다. 때를 놓친 만학도와 생각조차 없던 시인 지망생이었다. 한 가지만도 벅차고 어려운 것을 두 가지를 동시에 이끌고 가기란 욕심이고 무리였다. 꿈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한 역량에 자괴감이 들곤 했다. 늦은 자의 발걸음은 종종거려도 진전이 없는 제자리 맴이었다. 충고의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하지만 어떻게 찾은 기회인데, 그 어떤 것도 뒤로 미루기가 싫었다. 시작이 반이다란 관용어가 큰 재산이었다. 어차피 늦은 거, 속력이 아닌 대기만성이란 점괘를 믿고 묵묵히 나아갔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을 경험으로 체득한, 일생일대의 일이 되었다.

‘두 개의 꽃나무’는 무엇을 상징할까? 잎이 예쁜 것과 가지가 탐스러운 것이라 명명한 시구의 행간에서 은유의 깊이를 가늠해본다. 여러 층위의 형상들이 스친다. 두 개의 꽃나무는 당신의 전부일 수 있겠다. 견물생심은 인지상정,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린다. 화자는 당신의 정원이 헐벗을 줄 알고, 허전한 당신이 병드실 줄을 알고 있다. 나무의 속성은 잎과 가지가 함께 할 때 완전체를 이루는 것 아닌가. 어떤 것을 내주든 빈자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차라리 꽃나무 사이의 당신까지 가져서 모두가 한 풍경 안에 담긴다면 가장 이상적인 세계가 완성되지 않을까.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면 기쁘겠다는 이면이 역설적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