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품고 400년 ... 장수 황씨 종택 탱자나무 앞에서
가시 품고 400년 ... 장수 황씨 종택 탱자나무 앞에서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05.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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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에는 400여 년 된 탱자나무가 있다.
황희 정승의 7세손인 칠봉(七峯) 황시간(黃時幹, 1558~1642)이 심었다고 한다.
고택과 어우러진 탱자나무. 이원선기자
고택과 어우러진 탱자나무. 이원선기자

‘남귤북지’란 말이 있다. 기후와 환경에 따라 그 성질이 바뀜을 뜻하는 말로 강남(장강 또는 황하)의 따뜻한 지방에서는 귤이 되지만 북쪽의 추운지방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 유래는 전국시대의 제나라 재상 안영에 의해서 생겨났다. 안영의 유명세를 들은 초나라 왕이 그를 초청한 뜻은 어떻게든 그를 곤경에 빠뜨려 망신을 주고자 함이었다. 초나라 왕은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제나라로부터 초나라에 와 죄를 지은 죄수를 불러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자 죄수가 “제나라 사람입니다”라고 한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하는 물음에 죄수가 답하기를 “절도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초나라왕은 안영을 돌아보며 “제(齊)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는 모양이군요!”하며 비꼬는 것이었다. 이에 안영은 태연하게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강 남쪽의 귤을 강 북쪽으로 옮기면 탱자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저 제(齊)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있을 때는 도둑질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초(楚)나라로 와서 도둑질을 한 것을 보면 초(楚)나라의 풍토(風土)가 좋지 않은가 하옵니다.”하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굴곡진 삶의 밑둥. 이원선기자
굴곡진 삶의 밑둥. 이원선 기자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번지 소재 문경 장수 황씨 종택에는 수령 약 400여 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탱자나무가 있다. 두 그루가 한 그루처럼(종류가 다른 두 종이 이와 같이 자란다면 연리근이 되는 것이다.) 자라는 이 탱자나무의 높이는 약 6m, 폭은 동서 10.8m, 남북 11.2m의 위용을 자랑한다. 탱자나무를 심은 내력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단지 황희 정승의 7세손인 칠봉 황시간(黃時幹)이 이곳에 터를 잡으며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생몰연대(1558~1642)로 보아 광해군 후기나 아니면 인조 초기로 추정된다.
사실 탱자나무는 다른 유실수에 비해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수종이다. 이는 열매는 신맛이 강하고 나무의 줄기에 가시가 있어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나무가 뜰 안에 있는 것도 신기하고 400여 년의 세월을 오롯이 견디어 경상북도 기념물 제135호로 지정된 것 또한 거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앞마당에 자리한 탱자나무. 이원선기자
앞마당에 자리한 탱자나무. 이원선 기자

 

우리나라 주택구조의 경우 대청 앞마당에는 거의 나무 등을 심지 않는다. 심는다고 해도 담장의 주변에 배, 살구나무 또는 감이나 석류 등을 심는 정도이다. 이렇게 가시가 많은 나무는 잘 심지 않으며 간혹 심더라도 마당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탱자나무는 마당의 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렇듯 앞마당에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은 마당의 활용성을 높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뜻도 있다.
무더운 여름날 대청의 앞뒤 문을 열면 뒤란으로부터 찬바람이 일어 흡사 선풍기를 튼 듯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공기의 흐름을 적절히 이용한 때문이다. 태양빛이 강한 오후로 접어들면 앞마당에서 달궈진 공기는 위로 상승하고 이를 메우기 위해 뒤란의 습하고 찬 공기가 밀려드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마당이 달궈지려면 그 어떤 방해물이 없어야 한다. 이는 작은 나무나 풀포기조차도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녁이 되어 대청의 문을 닫으면 낮 동안 달궈진 앞마당의 열기로 인해 급격한 온도의 변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원리에 의한다면 탱자나무가 지금껏 살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무엇일까?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극히 상식적인 설명으로는 선뜻 수긍할 수가 없으며 탱자나무의 열매가 약이 되는 까닭에 심어서 가꾸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가을철 노랗게 익은 탱자나무는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그 화려한 유혹에 덥석 한입 베어 물면 그 신맛에 얼굴을 찡그리지만 은근한 중독성이 있어 결국에는 껍질만 남긴다. 현대라면 음식 연구가들에 의해 다양한 조리법의 개발로 양념 또는 음식으로 먹는 등 그도 아니면 약으로 사용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설득력이 부족하지만 이 탱자나무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유여하를 불문,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그래서 더 귀하게 보인다.
이런 탱자나무는 어린 시절 추억 속의 나무이기도 하다. 탱자나무는 가시와 함께 갈등(葛藤 : 칡과 등나무라는 뜻으로, 칡과 등나무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의지나 처지, 이해관계 따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을 일으킴을 이르는 말)을 연상케 하는 어우러짐 때문에 과수원을 둘러싸서 심어진 경우가 허다했다. 이는 뭇 사람들로부터 과수원을 지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영글어 가는 열매와 가시. 이원선기자
영글어 가는 열매와 가시. 이원선 기자

사과나무에서 꽃이 떨어지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하루가 다르게 토실토실 영글기 시작한다. 그즈음 가장 큰 걸림돌은 아무래도 탱자나무 울타리다. 틈을 보이지 않은 어우러짐과 촘촘한 가시들, 보통의 경우는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개구쟁이들에게는 그저 단순한 장애물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는 굽바자를 쉽게 들락거리는 개들이 만든 개구멍을 본따서 어느 순간에 틈을 비집어 사과서리를 하는 것이다. 정말 귀신같은 솜씨다. 물론 사과를 따기 위해서 개구멍을 들락거릴 때는 옷을 몽땅 벗어야한다. 이렇게 옷을 몽땅 벗는 이유는 가시에 옷가지가 걸리면 생선가시가 목구멍에 걸려 낭패를 보듯 꼼짝없이 잡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옷가지를 집어 들어서는 좌우를 살피는 망은 필수다. 그렇다고 100%의 성공은 없다. 1년에 한 두 번은 주인에게 덜미를 잡혀 호되게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지금은 절도죄에 해당되어 큰일날 일이지만 당시는 다 그렇게 살아왔다.
따지고 보면 가시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탱자나무 가시는 삶은 골부리(다슬기가 표준어로 충청도에서는 올갱이라 부르기도 한다.)의 속살을 파먹는데 일조를 한다. 저녁나절 해거름쯤이면 주전자를 들고 거렁(마을을 지나는 실개천)으로 출동이다. 다슬기를 잡기 위해서다. 한참을 오르내린 끝에 주전자에 추만(가득은 아니고 반은 조금 넘은 양)하게 잡으면 어머니께서는 옅은 소금물로 해감을 시켜 물을 뺀 뒤 한참을 놓아 둔 뒤 끓는 물에 털썩 부어 버린다. 이렇게 삶아야지만 제 아무리 날쌘 다슬기라 할지라도 제집에 다 못 들어가 파먹기가 쉬운 것이다. 이때에 가장 좋은 것은 시무꼬투리(시무나무가시로 시무나무가시는 작은 가지가 굳어서 된 것이다.)가 제일 좋다. 그 다음이 탱자나무 가시 그리고 바늘이다. 아카시나무나 장미가시는 무용지물이다.
400여 년의 생명을 어어 온 탱자나무도 그동안 많은 가시를 제공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가장 요긴하게 쓰였는지도 모른다. 황희 정승은 조선조의 명재상이다. 그 후손이라고 손님이 없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보이는 시골의 아늑한 양반가다. 칭찬도 많았을 것이고 간혹 가시 있는 나무가 집안에 있다고 지청구에 타박도 받았을 것이다. 차라리 은행나무나 회화나무였으면 양반가의 체면에 맞아 귀여움을 독차지 했을 것이다. 헌데 생뚱맞게도 탱자나무다.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하지만 뭇사람들의 입방아에도 불구하고 가을철이면 노랗게 익은 탱자 열매는 집안을 온통 달콤함으로 채웠을 것이다.

세월에 지친 탱자나무가 지지대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이원선기자
세월에 지친 탱자나무가 지지대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이원선 기자

그 달달한 유혹에 한입 물면 신맛이 정수리에 미쳐 얼굴은 찌그러지고 몸은 부르르 떤다. 그렇다고 함부로 버리지도 못한다. 어떻게 보면 그 신맛이 매실과 비슷하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입안 가득히 침이 고이는 것은 익히 그 맛을 알기 때문이다.
매실의 신맛을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이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다. 그가 단순히 꾀로만 유명했다면 위나라를 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임기응변과 그만의 독특한 철학이 후대로 하여금 삼국을 통일하게 만든 기초를 다졌을 것이다. 

조조가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산을 넘을 때였다. 때는 여름철로 접어드는 시기로 몹시 더웠던 모양이다. 병사들은 긴 행군에 심한 갈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행렬이 산중턱을 지나는 지라 그 어디에도 물이 보이지 않을 때 조조는 “이 산을 넘으면 매실이 있다. 우리 모두 힘을 내어 산을 넘은 뒤 마음껏 따먹자”고 했다. 이에 매실을 생각한 병사들의 입에는 침이 고였으며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실재 매실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매실의 신맛을 적절하게 이용한 사례다. 후세 사람들은 이때의 일화를 망매해갈(望梅解渴, 매실은 신맛이 나기 때문에 그것을 보기만 해도 침이 돌아 목마름을 없애 준다는 뜻으로, 공상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는 말)이라 칭하여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시니어, 노인 등으로 불린다. 탱자나무가 400여 년, 지금은 기념물이지만 또 400여 년을 산다면 보호수에 이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을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이 세월을 지나 보호받고 존경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무병장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탱자나무가 되었으면 한다.              

튼튼해 보이는 밑둥이 400여년은 무난한 듯싶다. 이원선기자
튼튼해 보이는 밑둥이 400여 년은 무난한 듯싶다. 이원선 기자

*문경 장수황씨 종택
“이 건물은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황희(黃喜 1363~1452)의 7세손인 칠봉(七峯) 황시간(黃時幹, 1558~1642)이 여기서 거주했다고 전하며, 현재의 건물은 당시의 습속과는 다르게 보여 진다. 이 건물의 안채 및 사랑채, 중문채 솟을 대문과 행량채가 있고 우측에 별도로 사당 및 유물각이 담장 내 배치되어 있으며, 유물각에는 방촌의 증손인 입향조 황정의 분재기와 방촌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문경지방의 양반 주거로서 “г자”형 안채 부분과 독립된 사랑채 부분이 결합된 배치이며,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평면 구성이 독특한 주거건물이다.“ 안내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