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의 '두꺼비'
박성우의 '두꺼비'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5.29 09:38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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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합천
2018-06-12 합천

 

박성우의 ‘두꺼비’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 만져 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 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시집 『거미』 창작과비평사, 2002-09-20

 

‘애완동물’을 사전에서 찾는다.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이라고 명시돼 있다. 요즘은 짝이 되는 동무란 의미의 낱말 반려伴侶를 써서 ‘반려동물’로 바꿔 부르는 추세다. 흔히 개나 고양이, 새와 금붕어 따위의 종류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뱀과 파충류 등 다양하고 이색적인 종種들이 시장을 점유한다. 그만큼 반려동물 애호가가 많아서일까. 반려동물관리사, 반려동물장례지도사도 있다. 덕분에 직업군이 다양해졌으니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다. 나의 시안詩眼이 얕은 탓이리라. 분명 동물애호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시제 ‘두꺼비’가 반려동물인가 싶었다. 1연과 2연을 읽는 동안은 그렇게 짐작하는 데 별반 의심을 품지 않았다.

두꺼비는 독샘이라는 데서 분비되는 흰색의 끈끈한 독액이 있다. 옛날에 고향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장家長의 몸을 보신시킨다고 두꺼비 세 마리를 가마솥에 푹 고와서 먹였다. 뜨끈한 보약을 먹고 뜨끈한 방에서 한 숨 자며 땀을 뺀다고 누운 사람이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진의 여부를 떠나 내겐 두꺼비의 이미지가 무섭고 부정적인 상징물로 남아있다. 왜 하필이면 화자의 아버지는 징그러운 녀석을 기르실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다가 3연에 이르러서야 ‘두꺼비’를 시어로 헤아린다. 그만큼 암시의 진폭이 넓다. 농부였지만 반 한량으로 살다 가신 내 아버지와는 완전히 대비된다. 부친의 흙 묻은 손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는 고달픈 생을 살다 가신 아버지를 돌아보는 고백적인 스토리가 주제다. 퇴근하면 손부터 씻는 노동자 아버지의 우툴두툴한 손이 원관념이다. 직접 드러내지 않고 보조관념인 두꺼비를 내세워서 은유적으로 형상화시킨다. 두 마리 두꺼비는 아버지의 양손, 막일판에서 최상의 도구는 손 아니겠는가. 거친 손을 탐색하고 사유하는 화자의 회상이 처연하다. 아버지가 두꺼비집을 짓고 겨울잠에 들었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음은 아버지의 부재를 간접화법으로 에둘러 말한다. 만물이 소생하는데 한 번 가신 아버지는 돌아오실 줄 모른다는 생략법이 서정의 극한에 도달한다. 술잔과 화투장만 들고 사셨지만 정녕 내 아버지의 손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