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8)
녹슨 철모 (8)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5.2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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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당신이 군의관이야? 일루와 봐.” 

느닷없이 처음 보는 대령 하나가 의무실에 와서 호통을 쳤다.

"거울 앞에 차렷해봐. 모자 벗고." 

이 무슨 뚱딴지같은 수작인가? 선임하사가 소개를 했다. 그 건방진 무례한은 보안대장 이 대령이라고 한다. 전방서는 보안대 병장만 나타나도 으스스했다. 군단사령부에는 보안대 대위가 상주한다. 이 대령은 군단 밖에 독립해 있는 보안대 대장이다. 우 중위는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우 중위의 초라한 복장은 그의 탓이 아니고 나라가 가난한 탓이고 군이 썩은 탓일 뿐이다. 군복은 전부 물이 빠진 것들이고 그나마 보급도 잘 되지 않아 우 중위는 쿠폰을 갖고 있어도 군복을 살 수가 없었다. 현재의 군복은 군의학교 후보생 때 입던 것이다. 낡고 후줄근한 옷이었다. 보안대에 있다면 이런 실정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야단을 치는 걸까? 군의관들에게 적개심을 가진 보병이 많았으므로 그도 그런 부류일까? 아니면 군단사령부 정도에서 근무하면 전방 부대와 달리 요령만 있으면 군복을 구할 수 있을 텐데 멍청한 녀석이라고 꾸중하는 것인지. 아무튼 그의 호통은 계속 이어졌다.

"야! 당신이 지금 한 손에 깡통을 들었다고 생각해봐. 그러고 길거리를 나서봐.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장교라고 하겠어, 거지라고 하겠어?" 

우 중위 뒤에 선 보안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정말 초라한 복장이었다. 군단 내에서 이처럼 남루한 군복을 입고 다니는 장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는 옷을 어디서 구해온단 말인가? 군대가 아니었다면 아무 죄없이 이런 망신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태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군대가 아닌가. 태원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욕을 참고 또 참았다. ’대통령 박정희에게도 덤벼들다 경찰서를 출입한 내가 기껏 네까짓 대령 나부랭이에게 내가 왜 당해‘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참은 것이 나중에 그에게 큰 덕으로 되돌아올 줄은 그는 모르고 있었다.

보안대장이 한바탕 심술을 부리고 떠난 며칠 뒤,

“여보, 군의관. 내 안압 좀 재어줘 봐!" 

헌병 대장 신 대령의 전화가 왔다. 우 중위는 안압을 잴 줄 몰랐다. 둘러대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님, 우리 의무대는 간단한 치료소에 지나지 않아 그런 안과 전문기구는 없는데요." 

기구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둘러대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대장이 한 마디 뇌까렸다.

"아, 그건 걱정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안과 가서 안압 재는 방법이나 연구해둬. 내가 눈에 무지개가 보여. 서울 안과에 갔는데 안압을 규칙적으로 측정해서 갖고 오라는 거야.”

그는 눈치 빠르게 간단히 이야기를 끝내 버렸다.

 

이 무렵 우 중위가 나에게 온 적이 있었다. 야전병원 안과에서 안압 재는 방법도 배우고 하소연도 할 겸 겸사겸사 들른 것이었다.

"참모장한테 얻어맞고 보안대장한테 쫑코먹고 이제 헌병대장까지 나타났네요.”

고생한다는 이야기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큰 부대에서 근무하며 높은 사람들과 상대한다는 자랑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냐면 그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그렇게 죽을 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나중에 우 중위의 신상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그 당시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느 날 우 중위가 환자에게 페니실린을 주사하고 주사기를 빼는 순간 환자가 의무실 바닥에 꽈당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쇼크에 빠진 것이다. 응급처치를 다 했지만 환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곧바로 앰뷸런스는 야전병원을 향해 통일로를 달리고, 우 중위와 황 병장, 문 상병은 차 속에서 심폐소생술을 하며 난리를 쳤다. 한 사람은 환자의 가슴을 규칙적으로 내리누르고 또 한 사람은 입으로 호흡을 불어넣었다. 앰뷸런스는 쾌속으로 달리건만 우 중위에게는 굼벵이 걸음처럼 느껴졌다. 호흡을 불어넣으며 교대로 가슴을 내리누르며 길을 달리다 보니 군의관과 위생병 둘 다 지쳐 이제는 이들에게도 응급조치가 필요할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30리 길을 달려 야전병원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환자가 숨을 쉬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도착하자 병원 위생병들이 이제는 살아난 환자를 응급실로 옮겼다. 우 중위는 심신이 탈진해 응급실 벽에 쓰러지듯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유, 실장님, 그러시다 실장님이 먼저 돌아가시게 생겼네요.”

웬 여자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우태원 중위가 고개를 들어보니 응급실에 근무하는 간호장교 유 소위였다. 그녀는 태원이 응급환자 후송 때 가끔 보는 신 참 간호장교였다.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말씨나 표정이 어쩐지 정이 가는 그런 묘한 매력을 주는 여자였다. 평소 태원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어떤 색다른 감정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콜라 한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서 있다가 살그머니 그의 곁에 쭈그려 앉았다. 우 중위는 그동안 야전병원에 여러 차례 왔어도 간호 장교들과는 전혀 교분이 없었다. 환자 후송 때라도 대개는 당직 군의관에게 환자를 인계하고 그냥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외간 여자와 수작을 붙이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까닭도 있었다. 그리고 평소 그의 신념이 여자란 남자와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할 그런 상대가 못 된다고 얕본 까닭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아무리 자신의 철학이 그러하더라도 저절로 가슴에 찡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 중위가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잔을 받으며 인사를 했다.

“유 소위, 고맙소.”

‘감사합니다' 라고 하고 싶었는데 계급이 자신보다 낮은 여자에게, 그것도 모처럼 느껴보는 호감 탓에 감정의 혼란이 생겨 군대식으로 인사말을 건네고 만 것 같았다. 후회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분위기도 아니고 몸도 무척 피곤하여 우 중위는 바로 부대로 돌아왔다.

통일로로 귀대하는데 유 소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야전병원에는 예쁜 간호장교가 많았다. 하지만 우 중위는 그녀들이 예쁘게 보이는 것은 군대는 여자가 귀한 곳이니까 그렇다며 애써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하긴 그런 이유라도 예쁜 것은 예쁜 것이 아닌가. 깔끔하게 뒷머리를 틀어 올리고 새하얀 유니폼을 입은 그녀들을 보면 정말 모든 간호장교가 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 속에서도 유 소위는 또 다른 매력을 주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냥 매력 있는 여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 앰뷸런스 속에서 우 중위는 이상하게도 계속 떠오르는 유 소위의 얼굴을 지우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립스틱을 바르는 것도 본 일이 없다. 그녀가 립스틱을 바르는 말든 우 중위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