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의 '문 열어라'
허형만의 '문 열어라'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5.16 11:2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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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8 도산서원에서
2019-04-28 도산서원에서

 

허형만의 '문 열어라'

 

산 설고 물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 제치니

찬바람 온몸을 때려

꼬박 뜬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젯밤에도

 

문 열어라

 

『비 잠시 그친 뒤』 문학과지성사-1999-10-20

 

허형만의 ‘문 열어라’는 서정시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가슴이 턱 막힌다. 애초에 시와 노래가 한 몸이었다 했던가. 나는 이 시를 노래 가사로 먼저 만났다. 태엽을 거꾸로 돌려 1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 나이지만 놀랍게도 바로 오늘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경북 군위에 소재한 인각사麟角寺에서 ‘산사음악회’가 열렸다. 무대에 오른 가수 장사익 씨가 ‘아버지’라는 노래를 열창하는데 그 곡진함에 별안간 내 묵은 감정이 복받쳐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곡비哭婢가 자기 설움에 운다더니 대신 울게 하는 호소력이 대단했다. 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중첩되면서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무렵이라 주위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멈출 줄 모르는 눈물 때문에 혼자 낭패감에 시달렸다. 늙수그레한 그분 특유의 한 서린 창법과 구성진 가락을 따라서 한 소절 한 소절 느리게 풀려나오는 가사가 어찌나 애절하고 처연하던지, 쉽사리 감정 정리가 되지 않았다.

시인은 아버지 장례를 치른 직후에 이 시를 만난 것 같다. 1연은 시가 탄생한 배경을 설명하듯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쉽고 간결한 문체가 시인이 당면한 아픈 상황을 헤아리기에 충분하다. 환청으로 들리는 아버지의 ‘문 열어라’라는 소리에 화자는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간다. 얼마나 실감 나는 대목인가. 내 아버지의 명령 같아서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이 문은 단순히 사물로서의 잠긴 문이거나 닫힌 문이 아니다.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형이상학의 문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시가 가슴에 더 와 닿는 것이 보편적 시각이리라. 이승과 저승, 아들과 아버지 사이를 가로막는 문은 시공간을 갈라놓은 단절의 지점이다. 화자는 ‘문’이라는 시어를 통하여 이제 더는 함께할 수 없는 딴 세계로 분리된 현실을 뼈저리게 인식한 게 아닐까. 다행인 것은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세상을 향한 눈의 문,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희망이 읽힌다. 그것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잘 견뎌냈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