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⑤꿈속은 언제나 어릴 적 놀던 큰거랑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⑤꿈속은 언제나 어릴 적 놀던 큰거랑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5.10 13:1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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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거랑’은 마을 근처에 흐르는 ‘가장 큰 거랑’이었기에 붙여진 이름
소달구지 건너는 비탈길에는 빨래터
금빛모래 속에는 다슬기와 재첩, 수초 사이로는 물고기
마을사람 누구나 개헤엄 칠 줄 알고 왼손에는 낫 상처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소평마을에는 큰거랑이 있었다. 한강 없는 서울을 생각할 수 없듯이 소평마을의 큰거랑이 그랬다. 규모나 역할로 봐서는 요단강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요단강은 레바논 북쪽 헤르몬산(2,814m)에서 발원하여 갈릴리호수를 지나 사해로 흘러든다. 강의 길이는 약 251km이다. [출처: 위키백과]

요단강은 이스라엘의 식수, 농업용수, 어장, 교통, 관광, 산업, 국방 등 모든 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강이다. 이스라엘 여행 때 본 요단강은 소평마을의 큰거랑 정도로 강폭이 좁았다. 수량(水量)도 비슷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곳에서는 침례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

마을의 서쪽 내리막길을 내려 와서 찍은 ‘빨래터 가는 길’, 비닐 깃대 지나 사진에서 길 끝나는 지점에 큰거랑을 건너는 시멘트 다리가 있고, 다리의 왼편 이쪽저쪽에 빨래터가 있었다. 사진은 경지정리 후의 모습이다. 정석암 촬영 동영상 캡처. 정재용 기자
마을의 서쪽 내리막길을 내려 와서 찍은 ‘빨래터 가는 길’, 비닐 깃대 지나 사진에서 길 끝나는 지점에 큰거랑을 건너는 시멘트 다리가 있고, 다리의 왼편 이쪽저쪽에 빨래터가 있었다. 사진은 경지정리 후의 모습이다. 정석암 촬영 동영상 캡처. 정재용 기자

큰거랑은 마을 근처에 흐르는 가장 큰 거랑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마을 공동우물이 생기기 전에는 큰거랑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큰거랑하면 빨래하던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구들장 모양의 박석(薄石)을 사람 앉는 쪽이 높게 되도록 고여 빨래판을 만들었다. 빨래터는 우물터와 더불어 마을 소식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빨래를 할 수 있었는데 밀리면 뒤에 앉아 기다렸다가 했다. 빨래가 끝나갈 무렵 남편이나 아들이 와서 빨래 다라이를 지고 가는 집도 있었다.

마을에서 양동들로 가는 길은 큰거랑을 만나면 끊어지고 소나 구루마는 물로 들어가야 했다. 수레를 뜻하는 일본어의 구루마가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사람은 섶다리 위로 다녔다. 나중에는 다리 기둥 위에 공사장에서 발판으로 사용하는 철판이 얹혔다. 철판은 건널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거랑 둑은 소달구지가 갈 수 있도록 거랑 양쪽을 비스듬히 깎아냈다. 사람은 다리로 건너고 소는 혼자 두어도 알아서 잘 건넜다. 물은 소의 무릎 정도에서 첨벙거렸다. 빨래터는 물 건너기 전 비탈길 내려가서 왼쪽에 있었다.

예천 회룡포에 놀러 갔을 때 내성천의 뿅뿅다리가 이 철판으로 돼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일부러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숭숭 뚫린 구멍 밑으로 흐르는 물도 큰거랑 물 만큼 맑았다.

음력설과 정월대보름 무렵에는 거랑 둑에 촛불을 켜 놓고 축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당 푸닥거리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큰거랑은 도움닫기를 제대로 하면 뛰어 건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강폭이지만 강물은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처럼 늘 도도하게 흘렀다. ‘큰거랑이라고 불린 이유가 가뭄에도 물이 넉넉하고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아 붙인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우면 크게 느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어떤 이들은 큰도랑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빨래터로 한 소녀가 걸어 내려오고 있다. 정재용 기자마을에서 빨래터로 한 소녀가 걸어 내려오고 있다. 정재용 기자​
​마을에서 빨래터로 한 소녀가 걸어 내려오고 있다. 정재용 기자

겨울 아침 큰거랑 물은 온천 마냥 물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손을 넣어보면 실제로 뜨뜻해서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쩍쩍 붙는 소한 추위에도 맨손으로 빨래를 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여름에는 물에 들어가도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을 만큼 시원했다. 수문을 닫아 놓으면 수문 안쪽은 매우 깊었다. 두 팔을 귀에 대고 위로 뻗치면 손끝이 잠겼다. 오뉴월 보리타작을 마치고 그 물에 풍덩 뛰어 들었을 때 기분은 그대로 날아갈 듯 했다.

바닥은 금빛모래가 두툼하게 깔려 있고 솜말, 붕어마름, 물수세미, 검정말 등 수초들이 모래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말즘이 긴 줄기를 물결 따라 이리저리 일렁이는 모습은 마치 처녀가 땋았던 머릿결을 풀고 행구는 것 같았다. 말즘을 우리는 그냥 이라 했다. 물고기들은 그 사이를 숨바꼭질하며 신나게 돌아다녔다.

모래 속에는 다슬기가 많았다. 우리는 사고디라고 불렀다. 모래 사()고둥에서 온 고디의 합성어일 것이다. 다슬기를 삶아서 까내고 거기에 부추를 쭝쭝 썰어 넣고 국을 끓이면 다슬기에서 나온 은은한 에메랄드 빛깔과 부추 빛깔이 어우러져 보기에도 좋고 맛도 일품이었다. 부추를 우리는 정구지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슬기는 사고디외에도 별명이 많았다. 청송 신성마을에서는 골부리또는 꼴부리라고 했고 황간 월류봉 근처 식당에 갔더니 메뉴판에 올뱅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올갱이라고 불렀다.

큰거랑에는 재첩도 많았다. 한 두 시간만 뒤져도 저녁거리는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재첩을 우리는 밤조개라고 불렀다. 알밤 모양으로 생겨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재첩에 부추를 넣고 끓이면 뽀얀 국물에 쌀밥 같은 조갯살이 떠올라 입맛을 돋웠다.

여름이면 아이들은 큰거랑에 가서 살았다. 어릴 때는 엄마 따라 빨래터에 가서 담부랑거리고소년이 되면 1호 수문으로 갔다. 물가에서 찰방거리며 노는 것을 담부랑거린다라고 했다. 빨래터 건너편 물 흐름이 느린 곳에는 고마리, 여뀌바늘, 창포, 돌미나리, 물옥잠이 섞여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 곁에서는 소금쟁이, 물땅땅이가 놀고 있었다. 가끔 무자치가 거랑을 가로질러 갔다. 우리는 무자지라고 불렀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수문이 1호 수문이다. 그 상류로 200m 쯤 더 올라가면 2호 수문, 기계천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3호 수문이 있었다. 우리는 주로 1호 수문에서 목욕을 했다. 2호 수문은 좀 한적했다.

1호 수문으로 가는 하천 둑에는 족제비싸리가 많았다. 우리는 그것을 왜싸리라고 했다. 마을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수문으로 가는 동안 왜싸리를 꺾어 들고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했다. 이기는 사람이 잎을 뜯어내는 놀이로 마지막 장을 먼저 뜯어내면 승리다. 군데군데 아까시나무도 섞여 있었다. 

소평사람 치고 헤엄 못 치는 사람이 없었다. 퐁당퐁당 개헤엄으로부터 시작해서 수문을 닫아 수심이 깊은 물에서는 다이빙과 자유형으로 수영 실력을 뽐냈다. ‘생존수영을 스스로 터득한 셈이다. 왼손 손가락에 낫 흉터가 있고 개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은 소평사람이 분명하다.

큰거랑 다리에서 바라 본 소평마을, 경지정리 후 모습으로, 큰거랑 가는 길과 물길 모두 곧아져서 마을과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다. 정재용 기자
큰거랑 다리에서 바라 본 소평마을, 경지정리 후 모습으로, 큰거랑 가는 길과 물길 모두 곧아져서 마을과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다. 정재용 기자

물놀이를 하다보면 때로 물에서 농약 냄새가 났다. 수문이 열려 수위가 낮아진 틈을 타서 누군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농약을 물에 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랐다. 작은 고기가 먼저 뒤집어져 흰 배를 내 보였다. 그럴 때면 1호 수문 아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물고기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붕어, 잉어, 송사리는 물론 메기, 뱀장어, 가물치도 잡혔다. 당시에도 위법이었지만 몰래 자행됐다.

1호 수문 물 떨어지는 둑에서는 검은색의 쪼대흙이 나왔다. 찰흙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여름방학 공작과제를 할 때 요긴했다. 물에 잠긴 쪼대 흙벽을 더듬어 가면 작은 굴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속에는 뱀장어와 참게가 살고 있었다. 팔을 구멍 깊숙이 넣을 때면 물이 입에서 찰랑거렸다. 가끔 뱀장어와 참게가 쌍으로 나왔는데 우리는 참게가 뱀장어를 불러들여 함께 살고 보초도 서 주는 것으로 알았다.

앞거랑 물로 고래전안강들농사를 지었다면 큰거랑 물로는 양동들 전체를 적셨다. 행정구역 상 큰거랑을 경계로 강동강서로 구분했다. 양동 쪽이 강동이고 안강 쪽이 강서였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큰거랑은 옛날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거기다 당시는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이라 사진도 없고 그렇다고 그림을 그려 놓은 이도 없어 회상할 방법조차 없다. 옛날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가 점차 사라질 뿐이다.

불도저 소리에 큰거랑 가는 길은 곧아졌고 구불구불하던 물길도 바뀌었다. 밟을 때마다 양철소리 내던 나무다리 대신 시멘트 다리가 놓이고, 빨래터에는 박석 대신 시멘트에 박힌 빨랫돌이 놓였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제껏 꿈에 본 큰거랑은 언제나 어릴 적 놀던 큰거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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