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요 외길 반세기 정은하 명창
민요 외길 반세기 정은하 명창
  • 김병두 기자
  • 승인 2019.05.07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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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을 오직 우리 민요를 부르고 가르치는 외길을 걸어온 명창
대구 향촌동 한국민요연구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사) 영남민요 아리랑 보존 회장이자 대구아리랑 보존회장 역할도
정은하 명창이 공연을 하고 있다. 정은하 명창 제공
정은하 명창이 공연을 하고 있다. 정은하 명창 제공

 

한 사람의 인생에서 오직 한 길에 자신의 삶을 바치기란 쉽지 않다. 50여 년을 오직 우리 민요를 부르고 가르치는 고달픈 외길을 걸어온 정은하 명창이 있다. 대구시 향촌동에 위치한 한국민요연구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영남민요아리랑 보존회장이자 대구아리랑 보존회장인 정은하 명창을 만나 명창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민요연구원 현판. 김병두 기자
한국민요연구원 현판. 김병두 기자

-우리 가락 민요를 배우게 된 동기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에서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들과 밭에 나가서 일할 때 부르는 농사노동요와 베 짤 때 부르는 길쌈 노동요, 놀면서 부르는 유희요 아리랑 등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일상에서 항상 듣던 소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향토소리인 영남의 메나리(아라리)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철이 들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하고 싶어서 1970년 중반에 상경하여 큰오빠 집에 기숙하면서 KBS민요백일장에서 노동요 '모심기소리'를 불렀다. 그날 심사를 하신 최종민 교수님을 만나 청구국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민요 공부는 어디서 했나.

▶18세 때 최종민 국악선생의 권유로 이창배 선생에게 4년간 경기선소리산타령 (중요무형문화재 19호) 경·서도 잡가와 시창 이론을 배웠다. 이 선생이 돌아가시고 안비취(중요무형화재 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선생 문하에서 1985년부터 10년간 경기 잡가를 배웠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면서 향토소리와 여러 민요를 동시에 체득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여러 지역 아리랑을 무대 공연을 통해 접할 수 있었고, 국악인이 가는 길에 대하여 지도를 받으면서 기초 예능을 닦았다.

-영남민요와 대구 아리랑을 하게 된 계기는.

▶경상도 특유의 억양으로 경기민요를 부르기에는 한계를 느끼던 차에 고향의 전통 민요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스승들의 권유로 대구로 내려왔다. 1985년부터 2016년까지 모내기 소리, 논매기 소리 등 영남지역 소리 조사 발굴(채록)을 위하여 지역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를 찾아가서 향토민요와 아리랑을 배웠다. 운전을 못해 버스를 갈아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1987년부터 대구 중구 향촌동에 한국민요연구원을 설립하여 30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동안 경북교원연수원, 대구교원연수원, 영남대학교, 대구교육대학교, 대구예술대학교, 경북예고 등에 출강하여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 MBC대구문화방송 창사 28주년 영남아리랑 다큐멘터리에서 아리랑을 취입하셨는데.

▶1990년 초여름 경북대학교 국문과 김기현 교수가 MBC 대구문화방송 창사 28주년 영남아리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며 동참하자고 했다. 김 교수는 대구아리랑은 사설은 있으나 선율이 없으니 대구아리랑 창작을 제안하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스럽고 두려웠으나 겁 없이 김 교수로부터 대구아리랑의 가사를 받았다. “산중에 /귀물은/ 멀구다래/ 인간의/ 귀물은/ 최양환이” 사람의 이름이 붙은 독특한 아리랑 가사였다. 작곡 공부를 한 적이 없지만 대구시 봉무동, 불로동에서 채록조사 때 듣고 배운 여러 곡 중에 엇모리장단의 아리랑을 선택하여 메나리조의 대구아리랑을 창작했다. 대구문화방송 공개홀에서 '대구아리랑'의 타이틀을 붙여 녹화를 했다. 대구아리랑은 MBC 대구문화방송 창사 28주년 기념 '영남아리랑 다큐멘터리'로 전국으로 방영이 되었다. 그 때 불렀던 대구아리랑의 노랫말과 선율은 대구 동구 봉무동 출신 최양환 어른이 불렀던 '불로아리랑'이며 최양환 어른은 최계란 명창의 친오빠이다.

-대구아리랑 축제와 전국아리랑 경창대회 개최를 시작한 계기는.

▶대구아리랑을 대구시민들과 공유하고 전국으로 확산하고자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기념하여 대구아리랑 축제를 제정했었다. 이 축제를 발전시켜 매년 광복절인 8월 15일 대구아리랑축제와 전국아리랑 경창대회를 동시에 개최하여 올해로 17회를 맞고 있다. 특히 대구아리랑은 대구 봉무동 출신 최계란 명창이 1936년 밀리온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곡으로 대구에서 노동요로 불리던 아리랑이다. 그래서 출전자는 지정곡인 최계란 명창의 대구아리랑과 자유곡으로 출신 지역의 아리랑을 부른다. 대구아리랑을 널리 알리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열정으로 2007년부터 자부담으로 고향 영천시에서 제1회 영남아리랑축제 및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 영천아리랑을 지정곡으로 선정하여 9년간 개최하였다.

2018년 대구아리랑 축제 포스터. 김병두 기자
2018년 대구아리랑 축제 포스터. 김병두 기자
2018년 대구아리랑 축제 폐회 때 참가자들이 아리랑을 합창하고 있다.  김병두 기자
2018년 대구아리랑 축제 폐회 때 참가자들이 아리랑을 합창하고 있다. 김병두 기자

-지금까지 취입한 음반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취입한 음반은 3장이다. 1992년 '정은하 민요 1집'(초·중등 국정교과서에 수록된 민요)과 2007년 '영남 아리랑의 재발견', 그리고 2019년 '대구 아리랑의 재발견'이다. 잊혀져가는 우리 민요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자비로 음반을 만들었다.

2007년 발간된 영'남 아리랑의 재발견' CD. 김병두 기자
2007년 취입된 영'남 아리랑의 재발견' CD. 김병두 기자

- 지금까지 상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 2002년도 제4회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상주모심기소리와 정선아리랑을 불러서 명창부 장원으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제4회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명창부 장원 상장. 김병두기자
제4회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명창부 장원 상장. 김병두기자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점과 기쁘고 보람된 일이 있다면.

▶민요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에 이창배 선생님을 사사할 때는 수업료를 내지 못해서 선생님 집안일을 돕고 틈틈이 뜨개질을 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내었다. 지금도 내가 입는 스웨터와 모자는 직접 뜨고 있다. 그 시절은 힘들었지만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리랑이 2012년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고 2015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된 것이 가장 기쁜 일이다. 이제는 장성한 학부출신 제자들이 내 뒤를 이어 여러 학교에서 아리랑 전승 및 교육을 하고 있어서 보람도 있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사랑 경험이 없다고 하면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말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민요에 빠져서 민요를 좋아하고 민요에 평생을 바쳤다. 나는 우리 민요와 아리랑과 결혼한 사람이다. 이제는 주변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 어쩌면 정말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어린 시절부터 민요를 좋아해서 살다보니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다. 이제는 민요 중에도 특히 대구 아리랑을 홍보하고 전수하는 데 내 남은 생을 바치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내 인생을 뒤돌아보기 위해서 수필을 쓰고 있다. 지난해 '최영환의 아리랑을 찾아서'로 에세이스트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70세쯤에 나의 인생을 담은 수필집을 내고 싶다.

대담을 마치면서 느낀 점은 정은하 명창의 마음은 아직도 신록의 나무들처럼 청춘이었다는 것이다. 화사한 모습은 10대의 순수함을 간직한 소녀 같았다. 한평생 한국 민요와 아리랑 전수의 외길을 걸어온 자신감과 그 속에 감추어진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다고나 할까. 정은하 명창의 바람대로 대구아리랑이 널리 알려지고 명창의 70년 인생을 담은 수필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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