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시인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 '옥비' 여사
저항시인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 '옥비' 여사
  • 이동백 기자
  • 승인 2019.04.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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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스며들고, 기억 속에 남은 아버지를 증언하는 이옥비 여사를 만나다
광야를 달리는 준마의 의지여, 백마 타고 올 초인이여
목재 고택에서 만난 이옥비 여사      이육사문학관 제공
목재 고택에서 만난 이옥비 여사 이육사문학관 제공

‘광야를 달리는 준마의 의지에는 조력(槽櫪-말구유)의 탄식이 없고 한마음 지키기에 생애를 다 바치는 지사의 천고일철(千古一轍-생애)에는 성패와 영욕이 아랑곳없는 법이다.’

육사 선생의 「광야」 시비에 조지훈 선생이 쓴 비문의 첫머리이다. 선생의 지사로서의 삶을 비유적인 함축으로 서술한 것이 칼날같이 날카롭고 적확하다. 조국 광복을 가져올 ‘초인(超人)’을 확신하며 온몸으로 일제와 싸우다가 어둡고 싸늘한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이가 육사 이원록 선생이다.

육사 선생은 직접 행동으로만 일제에 항거한 것은 아니다. 육사 선생은 서릿발 같은 저항 의지를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시, 그것도 결 고운 서정시로도 표현하였다. 이것이 여느 독립투사와 다른 육사 선생의 숭고한 삶이었고, 이것이 여느 시인과 다른 육사 선생의 준엄한 얼이었다. 우리 역사에 끼친 육사의 가치는 이러하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비 한 방울 나리쟎는 그 땅에도/오히려 꽃은 발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이옥비 여사가 평생을 두고 좋아한, 이육사의 「꽃」 일부이다. 이옥비 여사는 육사 선생이 순국하기 3년 전에 태어난 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다. 육사 선생이 딸에게 유일하게 남긴 ‘沃非’를 이름으로 오롯이 마음에 새기며 아버지, 육사 선생을 기억하고 현창하며 살아온 이옥비 여사. 여사의 삶 속에 켜켜이 스며든, 기억 속의 육사 선생 이야기를 듣기 위해, 햇볕 따사로운 어느 봄날, 이육사문학관 북카페에서 여사를 만났다.

-선생이 불혹을 갓 넘긴 연세에 여사께서 태어나셔서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가물거릴지도 모를 일이나, 기억나는 것이 물론 있으시죠?

▶당시 우리 집에는 증조부님과 삼촌들이 쓰던 낙관이 많았어요. 아버지께서 아침마다 누구의 낙관을 찾아보라 하셨는데, 글자를 알지 못하면서도 글자를 아는 듯이 낙관을 요모조모 살핀 다음에 찾으라는 낙관을 정확하게 찾아낼 정도로 총기가 있었나 봐요. 그렇게 찾아내면 아버지가 참 귀여워해주시던 것이 아직 잊혀지지 않네요. 언젠가 자주색 벨벳 저고리와 치마에 핑크색 모자, 가죽 구두까지 사다 주면서 예뻐해 주시던 일도 기억납니다. 그렇게 차려입고 시골 외가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옷을 만져보며 신기하게 여기던 일도 기억나고요.

-여사님이 어머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성품, 습관, 특기나 취미 등 말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강직한 성품이셨지만, 매우 자상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세수법이 좀 독특해서 물을 위로 훔쳐 올리며 하셔서 어머니에게 나무람을 당하기도 하셨고, 퇴계 선생의 활인심방(活人心方)을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수행할 만큼 건강에도 신경을 쓰셨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미적 감각이 뛰어나신 분이셨대요. 옷을 입으시는데도 패션 감각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패션이 다양했답니다. 아이보리색 양복을 입으시던 아버지가 기억나고, 나비넥타이도 매고 다니셨어요. 아버지의 미적 감각은 1941년에 가족에게 남긴 사진이나 최근에 발굴된 사진이 보여준 아버지의 패션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반듯하게 가르마를 탄 헤어스타일에 한복이든 양복이든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해요. 그런데 1943년에 찍은 걸로 알려진 사진은 가족에게만 남긴 것인 줄 알았는데, 최근에 열 명의 친구들에게까지 주었고, 촬영도 1941년에 한 것으로 밝혀졌죠.

예술적 기량은 아버지뿐만 아니고, 셋째 원일 삼촌과 막내 원홍 삼촌에게도 그 기량이 있었죠. 원일 삼촌은 서예를 잘 하셨고, 원홍 삼촌은 국전에 입선할 만큼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셨습니다. 첫 출품한 작품이 국전에 입선한 원홍 삼촌은 그 입선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대요. 삼촌들이 ‘니가 흥분해서 체했나 보다’ 하는 사이에 그만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첫째 원기 백부님은 글이 좋으신 분으로 아버지와 원일, 원조 삼촌과 함께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셨고, 넷째 원조 삼촌은 당시 유진오, 양주동과 함께 조선의 삼 천재로 알려진 평론가로 국혼(國婚)하신 분이시죠.

문학적 기량을 빼고서라도 아버지의 특기라면 무기를 잘 다루셨는데, 특히 사격술이 뛰어나셨대요. 이는 아버지의 항일 투쟁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지요. 그리고 알려진 바와 같이 '난'을 잘 치셨고요. 세상에 알려진 것 외에도 『육사시고집』에 난 그림이 들어가 있는데, 지금 전하는 난 그림보다 잘 그린 거였어요.

1943년에 찍은 걸로 알려진 이 사진은 가족에게만 남긴 것인 줄 알았는데, 최근에 열 명의 친구들에게까지 주었고, 촬영도 1941년에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1943년에 찍은 걸로 알려진 이 사진은 가족에게만 남긴 것인 줄 알았는데, 최근에 열 명의 친구들에게까지 주었고, 촬영도 1941년에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선생의 교우 관계나 우애는 어떠했습니까?

▶신석초 선생을 비롯하여 영양의 이병각 선생과 교유하셨고, 『신조선』을 만든 정인보 선생과도 깊은 인연을 지니셨어요. 특히 조풍연 선생과 찍은 아버지 사진이 1968년도에 『주간조선』에 실린 걸 보게 되었는데, 내가 늘 기억하던 아버지가 그 사진 속에 계시는 거예요. 그걸 어머니에게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를 그리 잘 기억하는 걸 보니, 참 총기가 있구나.’ 하시더라고요.

아버지의 형제들은 우애가 남달랐어요. 할머니께서 아버지 육형제들에게 ‘너희가 한자리에 모이거든 술, 담배를 함께 나누거라. 그래야 우애가 깊어지니라’고 가르치셨대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훈육이었던 거지요. 그만큼 우애를 강조하신 거지요. 육형제가 태어난 생가를 후에 육우당(六友堂)이라고 한 걸 보거나 함께 항일 운동에 서신 것들을 보면, 그 우애가 참으로 깊었던 거지요. 우리 어머니와 술도 한 잔 나누시던 작은아버지들은 당신들의 형수를 어머니처럼 따르셨죠. 아버지 유골 모시러 갈 때 작은아버지들 말씀이 ‘옥비 교육은 우리가 시켜 옥비를 형님 앞에 떳떳이 세울 테니, 형수님은 걱정 마시라’고 하셨다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나기도 하네요.

-여사님께서 생각하는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독립운동하시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죠. 커가면서 지식을 쌓고 안목이 넓어지게 되자, 비로소 아버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죠.

-여사님의 어머님은 영천분이신데, 아버지와 어떻게 혼인하시게 되었나요. 그리고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외할아버지가 초시를 하신 분으로 외가인 오동 마을에서 대지주여서 청송과 녹전에 전장(田莊)을 가지셨어요. 그때 혼사가 이뤄진 모양이에요.

어머니는 많이 배우진 못하셨지만, 가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신 지혜로운 분으로 저한테는 매우 엄격하셨어요. 아버지 성품을 좇아서인지 강단(剛斷)도 있으셨어요. 일본 순사에게 잡혀가 아버지 행방을 추궁해도 어머니는 ‘모른다’고만 하고, ‘그것도 왜 모르냐’고 때리면 ‘소박데기여서 나는 모른다’고 맞섰대요. 내가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가 체포되자 어머니가 잣죽을 끓여 갔더니, ‘소박데기가 왜 왔느냐’며 또 따귀를 때리더래요. 어머니가 ‘비록 소박은 맞았어도 남편이 위급할 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의 예절’이라시며, ‘임부(姙婦) 따귀를 때렸으니 천황에게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셨대요.

인심도 후하셔서 집에 찾아오는 손님도 많았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구에서 살 때, 우리 집을 ‘88여관’이라고들 했대요. 당시 우리 집이 대구 삼덕동 88번지였거든요. 그래서 아버지의 아내로서 전혀 모자람이 없다는 칭송을 들었지요.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평생 흰옷만 입으셨어요. 바느질 솜씨가 좋아 김태원이란 부잣집 침모 노릇하며 한 달에 비단 두루마기를 여러 벌 지으셨지만, 당신은 오로지 무명옷만 입으셨죠. 환갑이 지나고 제가 자꾸 권하니까, 회색 옷을 입으시다가 나중엔 차츰 옥색도 걸치시곤 하셨죠. 그렇게 독립지사의 아내로 맑게 사시다가 1985년에 돌아가셨죠. 참으로 한 많은 삶이셨지요.

-육사 선생의 혈육으로는 여사님 한 분뿐인 걸로 알고 있는데, 무남독녀였습니까?

▶아닙니다. 제 위로 오빠, 언니가 있었지요. 살아 있으면 여든아홉 살인 동윤 오빠는 두 돌을 지나서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경영 언니도 백일 지나고 역시 홍역으로 잃고 말았지요. 어머니의 마음고생은 헤아릴 수 없이 컸던 거죠. 어머니가 유독 원성이라고 제 재종숙에게 잘해 주셨어요. 그 아재를 특별히 살갑게 대해 주시는 까닭이 뭐냐고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그가 네 오빠와 같은 나이여서 그런다는 거예요.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한지 짐작되더라고요.

-육사 선생에게는 양자가 있긴 하지만, 유일한 혈육으로 무척 외롭게 살아오셨겠습니다. 슬하에 자녀는 몇 두셨습니까”

▶아버지에게 아들이 없어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원창 삼촌의 아들인 동박 동생을 양자로 입적시켰죠. 그 동생도 세상을 떠났고, 조카 승엽이가 아버지 대를 이어가고 있죠.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에서 1964년에 양씨 가문의 공무원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두었습니다.

2015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손을 맞잡은 이옥비 여사와 육사 선생의 손자 이승엽씨   이육사문학관 제공
2015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손을 맞잡은 이옥비 여사와 육사 선생의 손자 이승엽씨 이육사문학관 제공

-일본에 건너가 사신 적도 있으시죠? 일본서 돌아오셔서 곧장 문학관 일을 하셨습니까?

▶갑작스럽게 남편과 사별하고 제 친구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니카타 총영사관 관저에서 궁중요리와 꽃꽂이 일을 담당했죠. 그러다가 귀국하여 2007년부터 이육사문학관에서 상임이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여사님은 아버지, 어머니 두 분 가운데 어느 분을 닮으셨나요.

▶어릴 때는 외모도 아버지를 닮고 유하듯 하면서도 한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내고 마는 성격 또한 아버지 닮았다는 소리를 어머니로부터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커서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신 어머니를 닮아갔죠.

-육사 선생의 작품 가운데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어떤 작품입니까.

▶아버지의 작품 모두가 애착이 가죠. ‘광야’, ‘청포도’가 있고, 요즘은 ‘절정’도 널리 알려졌지만, 개인적으로는 ‘꽃’을 좋아해요. 꽃은 중학교 시절부터 좋아했던 작품인데, 강하게 남는 이미지가 좋았어요. 김춘수 선생의 ‘꽃’도 있지만, 아버지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이고, 세상에 아버지의 ‘꽃’과 같은 것은 없어요.

-아버지를 마지막 뵈었던 것은 언제, 어디서였습니까? 그때 기억에 남은 일이나 유언 같은 게 있으셨습니까?

▶할머니와 백부의 소상을 치르기 위해 귀국하셨다가 1943년 가을에 서울에서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셨죠. 압송당하시던 날, 어머니는 경황이 없어 저를 떼어놓고 아버지 면회를 가셨대요. 그런데 잠시 저를 맡아 보호하던 분이 집안 할아버지로 동아일보 출입 기자를 하신 분이라 세계정세에 밝으셔서 아버지의 운명을 헤아리셨나 봐요. 나를 데리고 청량리역으로 가셨어요. 거기서 압송당해 가시는 아버지를 뵈었죠. 아버지는 포승에 꽁꽁 묶여 있었고 얼굴에는 용수를 쓴 모습이셨는데, 지금도 기억하죠. 그런데 헤어지면서 어머니 품에 안긴 나에게 다가와서 ‘아버지 다녀오마’고 하셨다는데, 모습은 기억하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아버지의 그 말씀은 기억에 없어요.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죠.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신 아버님을 미아리로 모신 다음에는 어디서 사셨지요?

▶영천 외가로 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다섯 살 들면서 취학을 위해 대구 작은할아버지 댁으로 나오게 되었지요. 여덟 살 되던 해에 삼덕동으로 이사하여 1969년 서울로 이주할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버지와 삼촌들이 대구 남산동에서 사시면서 장진홍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고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어머니 말씀에 아버지는 조양회관에서 종종 주무시기도 했답니다. 1939년 경, 아버지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종암동과 명륜동에 살게 된 거고요.

-사드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이육사문학관 주최로 연변대학에서 ‘이육사문학제’를 열었잖아요? 연변대학에서 문학제를 마치고 육사 선생의 흔적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녔지요. 저도 여사님과 함께 육사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난징, 선양 등지를 갔는데, 선생이 순국하신 베이징의 현장에서 느낀 감회가 남다를 겁니다. 어떠셨어요?

▶베이징 감옥 자리를 찾아갔을 때 굉장히 슬펐죠. 무섭고 두려운 곳인데다가 지하여서 어둡고 너무 남루해서요. 느낌도 느낌이지만 자취가 없어질까 봐 앞으로가 더 걱정되었죠. 조그마하게나마 ‘여기 육사 잠들다’ 팻말이라도 하나 서 있으면, 찾아간 사람들이 묵념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슬픔이 있었죠.

-육사 선생이 1기생으로 졸업한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를 찾아가던 날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네요. 9월의 난징은 더웠지요. 그 더운 날, 학교가 있던 자리로 알려진 강소성 안길현 산하촌 마을을 찾아갔지만, 흔적마저 찾을 수 없었지요. 몇 천리를 와서 허망하게 돌아설 때 안타까워하시던 여사님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거기까지 가서 산만 멍하니 쳐다보다가 돌아설 때, 실체를 보지 못한 비통함이 있었죠.

-재작년에는 선양에 남은 선생의 흔적을 찾아 여사님과 동행했지요. 선생께서 3개월 정도 선양의 서탑가 3정목에 있던 근화여관을 만주 벌판의 겨울바람을 맞으며 찾아갔지요. 여관은 사라지고 없었는데, 낡은 건물에 ‘三丁目’이란 간판은 선명하게 붙어 있었지요. 간판으로나마 선생을 만나 뵌 것같이 기뻐하셨죠. 돌아오는 길에 여사님이 독백처럼 한 마디 남기셨지요.

▶그랬죠. 아버지도 근화여관에서 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만 같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나는 아버지와 함께 했다는 기쁨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한편 서탑가의 3정목이란 번지가, 우리가 한때 살았던 서울 명륜동 3정목과 공교롭게 같아서 흥분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더군요.

-지금 일본은 우리에게 진정성 있는 사죄를 하지 않고 있죠. 이러한 일본의 처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성하기는커녕 망언들을 마구 쏟아 내고 있어서 규탄하고 정죄하고 싶지만, 크리스찬으로서 그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본에서 6년을 살면서 일본인들의 근성을 알았어요. 집단을 이루면 무서운데, 개인적으로 만나면 점잖고 선량해요. 일본의 만행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엄격하게 지키되, 일본과 잘 지내야지요.

육사 선생 친필 원고인 ‘편복’이 2018년 5월에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로 제713호로 지정되었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육사 선생 친필 원고인 ‘편복’이 2018년 5월에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로 제713호로 지정되었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작년에 선생의 시, ‘편복’이 문화재로 등재되고, 올해는 새로운 자료도 발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좀 설명해 주세요.

▶‘편복’은 ‘바다의 마음’과 더불어 아버지의 친필 원고로 작년 5월에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죠. ‘편복’은 제713호로 지정되었고, ‘바다의 마음’은 제73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정현씨가 제공한 사진은 그의 부친 조규인 선생이 소장하다가 올해 공개한 것으로 아버지와 원일 삼촌, 조규인 선생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유일하게 한복을 입은 모습이세요. 다른 하나는 1943년 찍어 가족들에게 준 것으로 알려진 사진인데, 조정현씨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은 같은 것이지만 1941년 아버지 생신에 맞춰 친구들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죠.

원조 삼촌의 글인 듯한 자료를 봉화의 고택에서 발견했다며 지인이 전화했어요. 아버지와 관련된 편지인 듯하여 밤중에 택시를 대절해서 그 댁을 방문하였죠. 할아버지 상례를 치르고 조의를 표한 분들에게 띄운 답례 편지를 찾아내게 되었죠. 그 편지에는 삼촌 다섯 분의 성함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그 댁에서 문학관으로 가는 게 맞다며 흔쾌히 내주셨죠.

한복을 입은 유일한 이육사 선생(앞줄 오른쪽)의 젊은 시절의 모습. 뒷줄에 한복 입은 이는 이원일 선생이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한복을 입은 유일한 이육사 선생(앞줄 오른쪽)의 젊은 시절의 모습. 뒷줄에 한복 입은 이는 이원일 선생이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여사님 개인적으로 지닌 선생의 유품이 있습니까?

▶제가 보관하던 아버지 유품은 문학관에 다 내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제가 보관하던 많은 유품이 지금은 문학관에도 제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공개된 아버지의 휘호, ‘水浮船行’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외삼촌인 일창 허발 선생에게 써준 휘호인데,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준 외삼촌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내용이죠. 아버지가 남긴 유품 중에 아버지가 표지에 직접 난을 그려 넣은 『육사시고집』과 중국어로 된 성경을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었으나, 이것 역시 애석하게도 지금은 제게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던 비취인(翡翠印)에다 ‘贈S 1933.9.10 陸史’라고 새겨 넣어 윤세주 선생에게 선물로 주고, 「연인기(戀印記)」에다 이 사실을 쓰셨어요. S가 아버지의 여인인 줄 알고 어머니는 ‘사내 아이 하나라도 남기지’라고 하셨죠. 알고 보니, S가 윤세주 선생이셨고, 훗날 윤세주 선생의 종손녀가 ‘그 인장을 간수하지 못하고 잃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덧붙여 둘 것은 작은아버지들이 월북하시면서 친척에게 귀중한 자료들을 맡겼으나, 애석하게도 폭격으로 잃어버린 일입니다.

-선생에 대한 나라의 대우에 만족하십니까?

▶196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아 4등급의 서훈인데, 등급이 낮다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그러시다면 안동시나 보훈처에 바라는 게 있으시겠고, 상임이사로서 문학관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간략히 말씀해 주시죠.

▶보훈처에 우선 바라는 것은 행사 위주의 보훈보다는 보훈 가족을 위한 실질적인 보훈입니다. 그리고 문학관이 수장고가 좁고 미비해서 유품 수장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 문학관과 당국이 힘을 합쳐 해결해 나아가야 할 겁니다. 문학관에서 하는 행사가 많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이 많은 행사를 내 일처럼 생각하고 함께 힘써 치러나가길 바라지요.

-마지막으로 더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 주시죠?

▶서울 성북구청에서 아버지와 삼촌들이 사시던 자리에 이육사기념관을 짓는 중인데, 오는 6월에 완공해서 7월에 개관합니다. 뜻깊고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제가 할 일은 거의 다 한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와 가족들이 안동에서 대구로 이사해서 살던 남산동 집을 복원하고 육사가 살던 집이란 표지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