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의 '음악들'
박정대의 '음악들'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4.18 21:32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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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의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민음사 2001. 09.28)

 

라디오가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우리집 유일한 매개체였던 시절이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오디오와 같은 가전제품은 그 존재조차 모르던 때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1960년대 이야기다. 시골 동네 어느 집에도 없는 귀한 물건은 까만색 일제 트랜지스터.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소유하게 되었는지, 출처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우리 집 보물 1호로 대접받았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등에다가 제 몸 크기보다 더 육중한 건전지를 업어야만 소리가 나왔다. 볼품은 그랬어도 녀석의 위상은 대단했다. 이웃사람들까지 날씨를 우리 집으로 물어 올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일기예보 시간에, 아버지는 뉴스 시간에, 고모들은 연속극과 노래가 나오는 시간에 라디오의 주인이 되었다. 마치 그것이 법칙처럼 잘 지켜졌다.

길가 집인데다 촌집 치고는 방이 많아서 나그네들 방문이 잦았다. 주로 막차를 놓친 사람들이 하룻밤 묵어가거나 옹기·죽공예 장사꾼들이 사나흘씩 머물곤 했다. 여름의 어느 새벽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비 설거지하느라 보리논으로 나가고 어린 나 혼자 깨어있었다. 간밤에 들어와서 사랑채에 자던 아저씨가 돈 한 닢을 쥐어주며 과자를 사오라고 시켰다. 심부름 보낸 그 틈을 이용하여 라디오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들에서 돌아오신 할아버지가 일기예보 들으려고 라디오를 찾다가 분실한 사실을 알게 됐다. 인사도 없이 가버린 낯선 객한테 의심이 쏠린 건 당연지사, 불똥이 내게로 튀었다. 경찰과 동네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섰다. 멀리 못가고 이웃 마을 야산에서 소나무에 라디오를 걸어놓고 노래를 듣고 있더라 했다.

음악은 주인공이 되어 홀로 돋보이다가 때로는 요긴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산문시 형식을 취한 이 시는 마치 좋아하는 노래를 눈으로 듣는 기분이다. 청춘의 한 시절을 돌아보며 추억을 담담히 고백하는 서정성이 애틋하다.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시구들에 리듬감이 실린다. 노랫가락처럼 흘러가는 이야기성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박정대 시인의 시에 종종 등장하는 시어 ‘격렬비열도’는 태안반도 어디쯤에 실재하는 섬이다. 의성어로 쓰인 ‘위구르, 위구르’는 투르크 몽골계의 유목 민족을 뜻한다. '봉창'과 '고드름'에서 고전미가 느껴져 고향을 생각하는 순간, ‘파뿌리 같은 눈발을 썰’고 있는 화자의 심경과 맞닥뜨린다. 무릇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