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4)
녹슨 철모 (4)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4.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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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우 중위의 집으로 앰뷸런스가 들이닥쳤다. 차가 미처 서기도 전에 황문규 병장이 뛰어내렸다. 군단 참모들이 집단 식중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군단의 참모들은 대부분이 대령으로 참모 전용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우 중위는 먼저 야전병원에 지원 연락부터 해놓고 참모 아파트로 달려갔다. 한 집씩 돌아가면서 진찰을 하고 항생제와 수액주사를 놓았다. 선임하사와 위생병들도 있었지만 모두들 군의관이 직접 진찰하고 주사하기를 원하는 탓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집에 들어가니 다짜고짜 욕 소리가 들렸다.

"야! 이 개새끼야! 사람 다 죽어 가는데 왜 이제 오는 거야?" 

배를 움켜쥔 군수참모가 악을 쓰며 욕을 했다. 그는 아픈 것보다 우 중위의 느린 행동을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일어나 우 중위를 때리려고 덤벼들었다. 환자라기보다 상급자로 행세하며 악을 쓰는 그를 그 집 마누라가 말리는 바람에 겨우 주저앉혔다. 군수참모는 우 중위가 위수지역을 떠나 멀리서 놀다가 방금 귀대한 걸로 알았거나 혹은 딴 고참 참모들부터 처치하고 자기에게는 일부러 늦게 왔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계급은 높아도 저질이었다. 한 차례 다 돌고 나니 그제야 야전병원에서 온 군의관들과 간호 장교들이 나타났다. 우 중위는 이들에게 뒤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뭐 주고 뺨 맞는 꼴로 실컷 고생하고 돌아오면서도 기분이 무척이나 불쾌하였다.

이런 식의 대규모 사고는 흔하지 않은 일이므로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평소 장, 사병들과의 관계였다. 분창에서 워낙에 적은 양의 약품과 의료 소모품을 타오므로 처음에는 위생병들에게 의심을 받았고, 진상이 알려지고는 오히려 그들에게 칭찬보다는 바보 취급당하는 느낌이었다. 사병들이 상처를 입어서 왔을 때 거즈를 붙인 다음 고정시키는 반창고도 모자라 가로, 세로 길게 다 붙일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1센티미터쯤으로 짧게 잘라 네 귀퉁이에 한 장씩 붙이는 정도로 처치를 마무리하는 수준이었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물론 약도 충분하게 처방할 수 없었다. 간단한 감기약이라도 그 양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렇다고 분창 장을 찾아가 새삼스레 타협을 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행히 시간이 가면서 의무실 위생병과 선임하사는 우 중위의 성품을 이해하고 그의 편이 되어주었다. 융통성 없이 성질부리다 제 몫도 못 찾아 먹는다는 소문이 부대 내에 퍼지자 그중 어떤 이는 청렴결백한 군의관이 왔다고 칭찬하기도 했지만, 대개의 장, 사병들은 무능한 군의관, 현실감 없는 군의관이 왔다고 이죽대고 비웃는 분위기였다. 참모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불러 꾸중하는 이도 있었다.

“이전 의무실장은 말이야. 참모들에게 구급 약품 세트도 만들어 갖다 주고... 정말 유능하고 인정도 많았는데 이번 당신은 왜 그리 무능해,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힐문하는 참모는 그래도 점잖은 축에 속했다. 어떤 참모는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야! 군의관! 너 혼자 약 다 먹지 말고 나도 좀 갖다 줘봐.” 

반 농담조였지만 우 중위에게는 협박처럼 들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우 중위가 나를 찾아왔다.

“형님, 죽겠어요. 몸도, 마음도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어요. 헌병대나 보안대에서 나를 조사하러 올 것 같아요. 사병들의 눈초리와 참모들의 협박도 견디기가 힘들어요. 어떨 때는 이러다가 죄없이 잡혀가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어요.”

우태원의 이토록 기죽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학교 다닐 때도 진짜 학자 같은 교수가 없다며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자퇴서를 내고 기세 좋게 나에게 찾아온 적도 있었다. 데모하다 경찰서에 잡혀 있던 그를 찾아갔을 때도 한 번도 기죽은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군의관 할 때 잠깐 서울에 와서는 나에게 이렇게까지 말하던 그였다.

"막상 살아 보니 군대가 제 적성에 딱 맞아요. 옛날 제가 자퇴서 쓰고 장교시험 보겠다고 형님에게 의논했던 거 기억나요?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그냥 계획대로 보병으로 들어와 말뚝 박을 걸 그랬나 봐요. 하하하.” 

그는 그렇게 한참씩 너스레를 떨다 가곤 했다.

내가 보기에는, 같은 군대인데도 그에게는 최전방 야전군인 생활과 행정 위주의 군단 생활이 너무 다른 분위기라 적응을 잘못하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뚝심과 적응력을 믿었기에 모르는 척하고 무책임하게 말했다.

“세상살이란 다 그런 거야. 세월이 가면서 다 적응하게 되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