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6)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6)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9.21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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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그랬나 싶어 머리를 문설주에다 한껏 쥐어 받고 싶다
변덕스러운 성질머리가 언제 어느 순간 돌변할지 짐작조차 못 할 일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화들짝 놀란 탓에 절로 몸이 밀착이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말 한마디 슬쩍 건네곤 당장에 다 같은 소작인으로 인정하여 나락 한 가마니까지 아끼지 않은 분인데!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귀천이 어디 있고 상하가 따로 없다며 양아버지 이후 날 사람다운 사람으로 대해준 고마운 분인데! 그런 마님을 두고 나는 어째서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알 듯 바보 같이 굴었단 말인가? 그렇다고 주제도 모르고 기분에 따라 불쑥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고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후회할 짓을 왜 했나 싶다. 앉은자리에서 알랑방귀라도 좋아 시원스럽게 언니라고 불러드릴걸!, 간도 쓸개도 내놓으라면 싸그리(‘깡그리’의 방언) 내놓아야 할 판국에 어째 그랬나 싶어 머리를 문설주에다 한껏 쥐어 받고 싶다. 내 꼬락서니에 머리털을 뽑아 신을 지으라면 군말 없이 삼아야 할 판국에 그까짓 말 몇 마디가 다 뭐라고!

잠시나마 진정한 내 편으로 시절인연(時節因緣: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말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에 세월없이 목멜 게 아니라 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한다면 정해진 인연도 변한다는데! 늘 그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공을 들인다면 이 생애 또다시 만날 뵐 수나 있으려나? 지금 당장에 눈앞으로 서글서글한 눈매가 삼삼하여 그리운데 이를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가름한 얼굴이 눈에 밟히는데 문이라도 한번 열어봐 주었으면, 한껏 미련이 남아 뒤돌아 뒤돌아서 아쉬운 작별 끝에 시부저기 마당을 나와 솟을대문을 나서자 덕배는 분주히 나락 한 가마니를 지고는 저만치에서 휘적휘적 앞장이다. 확인 차 딱 한 번, 힐끔 돌아보고는 내쳐 걷는다. 예상은 했건만 막상 눈앞으로 펼쳐지고 보니 복녀는 또 외딴 고도(孤島)에 홀로 버려진 듯 외롭고 쓸쓸하다.

“제 놈의 부룩송아지를 닮은 듯 못된 버르장머리가 그러면 그렇지!” 허전한 가슴을 부여안고 걷는 복녀는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이라 해서 뾰족한 수가 있으라 싶었다. 홀로 터덜터덜 걷는데 세상에서 저 홀로 불행하다는 생각이다. 저기 저 길 가장자리 저만치서 서리맞은 소국의 향기는 저리도 감미로운데! 나뭇가지에 오종종 앉은 참새는 조잘조잘 저리도 다정하여 정다운데! 고개를 숙인 눈으로 드는 아랫배가 무람없이 원망스럽다.

생각에 잠겨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로 앞서갔던 덕배가 눈앞으로 아른아른하다. 다른 볼일 있는 모양인 갑네! 눈을 땅바닥에 둔 복녀가 못 본 척 내쳐 걷는다. 그런데 이내 도착한 덕배가 고개를 숙인 복녀 앞을 이유 없이 막아선다. 혹여 그새 미운 살이 도져 때리려나 싶은 복녀가 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려 피한다. 한껏 두려워 옆으로 비켜서 보지만 소용이 없다. 비켜서는 족족 일일이 찾아서 앞을 막아서는 덕배가 저승사자만 같다. 오지게 때리려고 주먹은 쥐었으려나! 고개를 한껏 움츠려 비켜 가리라 피해 보지만 소용이 없어 제자리 곰뱅이(남사당패가 놀이를 벌이고자 하는 마을의 어른이나 이장에게 찾아가 허락을 받는 일) 신세로 주춤거리기만 하는 복녀다. 그러기를 몇 차례나 실랑이 끝에 참다못한 복녀가 가냘프게 하소연이다.

“저기~ 저~ 이것 보셔유! 어째 벌건 대낮에 남세스럽게 무단 길을 막고는 왜 그런다유? 때릴라치면 두 말없이 두들겨 패던가 않고는 어째 겁만 주고 그런데유! 알라(‘어린아이’의 방언)들 장난도 아니고 당최 왜 그려셔유?”

“때~ 때리기는 시방 누가 때린다고 그래!”

“그~ 그럼~ 때릴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그러세유! 저기~ 저! 이봐유! 나도 어서 빨랑 집에 가서 군불도 지피고 저녁밥도 지어야 하고 갈 길이 바쁘구먼유! 근깨 저리로 얼릉 안 비키나게유!”

“응~ 그~ 그게! 그러니까 그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대답에 덕배가 못 들은 척 다짜고짜 복녀 앞으로 등을 돌려 앉는다. 하는 모양새가 곧장 업을 기세다. 뜻밖의 사태에 적이 당황한 복녀가 얼굴을 벌겋게 말을 더듬는다.

“아~ 근게! 남세스럽게~ 저기~ 저 벌건 대낮에 한 길가서 이게 뭣하는 짓이래유! 워째 이런데유! 동네 사람 부끄러운 줄 모르고유!” 한사코 거부다. 하지만 덕배도 이미 작정을 한 듯 물러날 기미가 전혀 없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만 좋단 말인가? 우물쭈물 망설이는 복녀는 난감하기 그지없다. 나름 반항이지만 이미 글렀다는 생각에 낭패한 표정이 얼굴로 역력하다. 하긴 지금껏 한 번도 힘이나 말로 덕배를 이겨본 적이 없는 복녀다. 밑천이 바닥나 할 말이 없다 싶으면 주먹을 앞세우는 통에 처음부터 승리의 행방은 정해졌다 할 수 있었다. 그런 판국에 오늘도 버텨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란 걸 직감하고 있었다. 단지 집안이 아니라는 점에서 매질 세례는 용케 피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안심이다. 한데 또 모를 일이다. 여우비란 말처럼 여름 소낙비의 요사스러움은 소 잔등(‘등’의 비표준어)도 대중없이 가른다고 덕배의 천변만화의 변덕스러운 성질머리가 언제 어느 순간 돌변할지는 짐작조차 못 할 일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이 그 누구보다 만만한 서방님 앞이 건만 마음껏 투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음과는 달리 어느 한순간 덕배의 막무가내 앞에 등짐처럼 업힌 복녀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 옛날 양아버지가 업어 줄 때의 안락함이 없다. 복녀 생각에도 덕배의 넓은 등으로 입힌 자신이 꼭 등짐이나 통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는 달리 덕배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복녀를 업어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을까? 아니면 복녀를 업을 수 있어서 세상을 얻은 기분일까? 실로 오랜만에 듣는 덕배의 콧노래가 감미롭다. 가슴으로 스민 은은한 가락이 잔잔한 호수면 같다. 그 모습에 복녀는 ‘마누라가 아기를 가지면 집안 경사라고, 장한 일을 했다고 너나없이 업어 준다는데’ 이 미련-곰탱이(‘미련퉁이’의 방언) 같은 이 인간이 진짜 뭘 알긴 알고 이러나 싶어 겁부터 덜컥하여 가슴이 섬뜩하다. 그나저나 불편한 이 노릇은 어찌할거나! 곰곰이 생각 끝에 하는 말이 행여 비위를 상할까 조심스럽다.

“저기~ 저~ 이봐유! 아~ 이것 좀 보셔유!”

“응~ 무~ 무슨 일인데 그래! 왜? 왜 그러는데!”

“저~ 저기 저~ 나 쪼까 좀 내려봐 줘유! 근께 좀 내려줘 봐유! 당최 이게 다 뭐여유! 짐짝도 아니고 불편해서 죽겠시유! 다시 업~!” 다시 업힐 요량인지 ‘업’을 말하는 복녀는 속으로 뜨끔했다. 언제 복녀 자신이 이렇게 대담했나 싶다. 얼마 만에 덕배를 두고 속에든 말을 하는가 싶어 두려운 한편으로 속이 다 후련했다. 복녀의 그런 조마조마한 마음을 비웃는 듯 덕배는 수월하게 반응이다.

당장에 덕배의 등을 벗어난 복녀가 치마를 둥둥 걷었다. 그러자 다리가 한결 편안해진다. 다시 덕배 등으로 몸을 싣는데 기다렸다는 듯 엉덩이를 양손으로 받치더니 등으로 추슬러서 일어선다. 그와 동시에 복녀는 보따리를 든 양손을 덕배의 목으로 교차하여 가볍게 끌어안는데 듬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안락함이 밀물로 밀려와 가슴이 벅차다. 아비라서 그럴까? 아기가 곤하게 잠이 들었을 아랫배가 따뜻해서 날아갈 듯 좋았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문득 덕배가 웅얼웅얼 지나가는 듯 말을 한다.

“저기 저~ 이것 좀 보게~ 저기~ 저 복녀야! 우리 일간(日間:가까운 며칠 안에) 날이나 잡아서 그동안 차일피일로 미뤄서 못 했던 혼인신고나 할까?”

“...!”

“아~ 왜? 복녀도 그간 수시로 원했잖아!! 왜? 그러기 싫어! 주먹질에 막 돼먹은 내가 꼴도 싫어 그래? 어째 쓰다 달다는 대답이 없어 응~! 나는 시방,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은데! 어때?”

“차일피일로 미루다가 못 했다고? 그걸 미루다가 못했다고? 이런 이 미친놈 같으니!” 속으로 중얼거리는 복녀는

“응~ 저~ 저기! 저~ 시방 뭐라 했시유?” 놀란 듯 대답하는 복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절로 몸이 밀착이다. 덕배의 목을 감아쥔 팔에 불끈 힘이 들어간다. 진정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확답을 다짐으로 묻는데 울대가 바이브레이션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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