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칼로 종이 자르듯 냉정하게 거절할 처지도 아니다
학철부어(涸轍鮒魚)라 당장에 굶은 판국에 온갖 살림살이에다 먹을 것을 내어주고
“‘흥부전’이네유!” 잠시 머뭇거리던 복녀가 손으로 보물을 다루듯이 겉표지를 쓰다듬어 조심스럽게 첫 장을 펼친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고모는 진짜로 편하게 읽으라는 듯 저만치로 돌아앉더니 반짇고리에서 노란 색실을 찾아 바늘귀에다 꿴다. 능수능란한 동작이 깔끔하여 아름답기까지 하다. 베갯잇에 놓던 봉황 자수(刺繡)에 열중인데 등 뒤로부터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팔랑팔랑 일정하다. 그것도 잠시 점차로 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 결부터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가늘게 코 고는 소리만 방안으로 잔잔하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리도 곤하게 잠이 들었을까?” 잠든 복녀의 귀밑머리를 가만가만 쓸어 가며 얼굴을 보는 고모는 가슴 저 밑으로부터 잔잔하게 일어나는 야릇한 행복감에 젖는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꿈길을 달리는 복녀다.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던 복녀가 춘곤증(春困症)을 못 이긴 모양이다. 춘곤증이란 단어처럼 어째 봄에만 이상야릇하게 잠이 쏟아질까? 초겨울이라도 등 따습고 배가 불러 꼬박꼬박 존다면 다 춘곤증이지. 게다가 복녀는 수면제보다 더 독하다는 책을 손에 잡았다. 뱃속 아기도 아직은 ‘가갸거겨’ 글이 어려운가 보다. 공부는 다음으로 오수(午睡)에 빠지고 싶다는 데는 어느 어미가 이길 수 있을까? 얼마를 잤을까? 긴 기지개 끝에 눈을 뜨고 보니 머리로는 베개를 베고, 온몸은 포근한 비단이불로 두리두리 싸였다. 무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가만가만 이마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애교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가며 옷매무새를 다듬는데 인기척에 다가든 고모가 말했다.
“그간 많이도 곤했나 보네요?”
“...!”
“괜찮아요! 내 본래 그리 쉬라고 자네를 불렀는데 뭘 그러는가요?”
“그~ 그래도~ 지~ 지는 하찮은 이년이 하늘 같은 마님 앞에서 볼썽사납게 이 뭔 추태(醜態)래유! 똥오줌 못 가리는 얼라 맨치로 철딱서니 없이 어째 이러는가 모르겠네유! 마~ 마님 ~ 참말로 이 년이 감사하네유!”
“아니 난 그런 공치사는 필요 없고, 단지 자네만 괜찮다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고모는 복녀에게 나이를 묻는다. 이윽고 나이를 비교하던 고모는 복녀가 세 살이나 어리다며 이제부터 ‘야, 자’로 말도 편하게 터 가며 의자매를 맺는 것이 어떠냐며 넌지시 의중을 묻는다. 뜬금없는 고모의 제안에 복녀는 적이 당황스럽다. 그보다는 그 언니라는 호칭이 복녀에게는 썩 내키지 않아 달갑지 않은 때문이기도 했다.
남사당패 단원으로 있던 시절이다. 여자 단원의 나이가 많으면 조건 없이 언니다. 대략 15여 년을 넘으면 대부분 이모로 통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살갑게 조카, 질녀, 생질에 여동생으로 입에 붙는 대로 나불나불 떠벌리지만 아니면 뉘 집 똥개가 짖는가 모르쇠로 일관이었다. 게다가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몸도 아니건만 이런 곳에서는 누구나 다 그래! 음으로 양으로 매음(賣淫)을 알선하는 등으로 암암리 금전거래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탕발림으로 꼬드긴다. 은근하게 불러내서는 일종의 매춘(賣春)을 성사시켜 잇속을 챙긴다. 재주는 곰이 부린다고, 사후 앙앙불락 달려들고 비굴한 표정에도 수그러들지 않으면 처녀도 아닌 주제에 알건 다 알아 국 떠먹은 자리처럼 너도 즐겼으면서 뭘 그러냐고 안면몰수(顔面沒收)다. 독수공방에 회포를 풀어준 공을 이런 식으로 보답이냐며 억울하단다. 적반하장격으로 거지 동냥인 듯 엽전 몇 닢 던져 뒤집어 씌워버리는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복녀가 두 번째로 단원에게 호되게 당한 것도 후일 알고 보니 그 언니란 족속들이 벌인 사단이었다. 그런 만큼 언니란 호칭이 복녀는 마냥 싫었다. 한데 상대는 소작농을 쥐락펴락하는 작은 마님이다. 이 난국을 어떻게 한다? 부지불식간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하다. 그렇다고 칼로 무 자르듯 냉정하게 거절할 처지도 아니다. 졸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흡사 오동나무에 걸려 바람을 타는 가오리연처럼 마음만 심란할 뿐이다. 마지못해
“저~ 마님! 저 그것이! 허접한 노래판에서 하찮은 노랫가락이나 입방정으로 나불거리던 저같이 미련하고 개 돼지처럼 천박한 년이 어찌 마님이랑 대거리로 말을 놓아가며 트고 의자매(義姉妹)를 맺다니요! 지나가던 소가 들으면 웃을 일로 가당치가 않구먼유, 그리고 저~ 그것이 유~!” 말끝을 흐리는데
“알았네요! 자네가 정 싫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요! 그렇다고 개 돼지라니요! 아무튼지 오늘 이 자리에 당장에 대답을 듣고자 강요는 않겠어요!”
“하여간 벌레만도 못한 이년이 참말로 죄송하네유!”
“아~ 아니에요! 그만 일에 죄송은 무슨 죄송에 흉측스럽게 벌레는 또 뭐예요!, 향후라도 마음이 바뀌면 행랑어멈을 통해 언제든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난 그저 복녀~ 자네만 좋다면 언제든 쌍수로 환영이네요!” 고모가 다시 복녀의 두 손을 꼭 잡는데 행랑어멈이 배시시 방문을 연다. 표정으로 보아 떠날 준비가 얼추 된 모양으로 보였다. 그제야 복녀도 자리를 털어서 일어선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여 작별인사다.
복녀가 밖으로 나오자 대청마루로는 동네 아낙들이 이리저리 분주하다. 한껏 미안한 마음에 양손을 비벼가며 좌우를 살피는데 미향 어미가 꽤 커 보이는 보따리 하나를 손에다 쥐여주며
“이보게 복녀 동상! 자네가 오늘 그 누구보다도 큰일을 했네!” 공치산데 복녀는 온종일 먹고, 자고, 놀았다는 자격지심에 절로 죄스럽다. 그저 고개를 굽신굽신하는데 어느결에 옆으로 다가선 행랑어멈이 보따리 하나를 손에다 쥐여주며 말하기를
“내 자네가 몸 풀면 먹으라고 돌미역 한 다발을 넣었으니 잘 보관하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아~ 그리고 몸 풀면 꼭 연락하게! 우리 작은 마님과는 산달도 두서너 달 남짓으로 틀린 것 같고~ 내 육소간에 들려 소고기 근이나 끊어서 서툴고 미련한 솜씨일망정 친정 어미 노릇을 한번 해볼라네!”
“예~ 아~ 아니야유! 어떻게 그렇게까지 폐를, 마음 쓸 필요 없어유! 저~ 저가! 아니면 저이가 하든가 하면 되야유?” 말을 하고 보니 또 거짓말인가 싶어 가슴이 뜨끔하다. 과연 그런 날이 내 생애에 오려나 싶어 얼굴로 힘이 빠지는 중에 심신이 아득하게 내려앉는 기분이다. 그런 복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행랑어멈이
“뭔 그런 가당찮은 소리를! 삼칠일 전의 산모가 겁도 없이 바깥바람에 나들이라고? 아서라 그러다가 한기라도 들면 성한 몸에 골병들어, 젊은 객기에 큰일 날 소리를!”
“그래도 그러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닌 듯싶어 그라지유!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그리할 수는 없지라유!”
“아~ 근디 이 젊은 여편네가 워째 이러는지! 내 웬만하면 이 말까지는 안 하려 했네만 자네의 그 쓸데없는 똥고집 때문에 어쩔 수가 없네! 이 모두는 작은 마님의 뜻이라네! 그러니 복녀 자네는 그저 못 이기는 척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게!” 지긋이 바라보는데 그제야 복녀는 그 언니라는 단어가 실감 난다.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바뀐다고, 원님 덕에 나팔이라고 한껏 가까워진 이웃 간의 정도 그렇고, 학철부어(涸轍鮒魚)라 당장에 굶어 죽을 판국에 온갖 살림살이에다 먹을 것을 내어주고, 아쉬운 소리 한마디 없이 못갈림(탈곡하지 않은 상태의 뭇으로 나누는 소작. 전남 방언)처럼 날치기도 아니고 정식으로 농사지어 먹을 땅을 선뜻 내어주는 것도 모자라 힘든 일을 피해 알뜰살뜰 시혜(施惠)로 챙겨주는 마당에 앉은 자리에서 선선히 답을 못한 자신이 못내 후회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