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에이지 골든라이프] 이재윤 병원장을 만나다, 마이더스의 손 ①
[골든에이지 골든라이프] 이재윤 병원장을 만나다, 마이더스의 손 ①
  • 장기성· 강효금· 조동래 기자
  • 승인 2019.04.12 09:3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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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플란트 누적 8만개 세계 최대 기록 ... 자기 분야에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결기가 바탕
'적지만 자주 나누자' 일상화된 기부 ... 장학금은 누군가에게 디딤돌이나 기회가 될 수도

 

이재윤 병원장은 "임플란트 전문병원은 다릅니다.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중요하다"라고 말하고있다.   조동래 기자
         임플란트는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하다며 '임플란트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재윤 원장.  조동래 기자

 

임플란트를 누적해서 8만개, 한 달에 평균 300개를 심습니다. 앞으로 이 분야에서 세계 1인자로 남고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제 삶을 지탱하는 보람이자 사명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적 신기록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현재 그가 맡고 있는 직책은 30여 개에 이른다. 대부분 전국단위 조직의 장으로 돈 되는 것은 없고 돈을 써야 하는 봉사단체다. 시인이자 수필가이며, 굴지의 잡지 발행인이기도하다. 그런데 직업은 의사다. 이 많은 분야에 프로페셔널한 지식과 베푸는 카리스마가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할수록 물음표가 붙는다. 찾아 나섰다. 짧은 1시간 인터뷰지만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 보니 질문 항목이 산더미다. 그래서 1,2부로 나누어 시리즈로 게재하기로 하였다.

 

-원장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도 치과의사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까?

어릴 때는 치과의사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사실 저는 유년시절에는 문학가나 철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치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형님 덕분입니다. 형님이 당시 치과 기공소에 다녔기에 어깨너머로 그 쪽의 직업세계를 알게 된 것이지요.

치과의사가 된 것은 어쩜 생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5-60년대 척박한 농촌현실은 먹고사는 것이 절체절명의 문제라는 걸 일찌감치 알아채고 문학과 철학을 내팽겨쳐야 했습니다. 당시 생각은 치과의사를 10여 년 한 후에 내가 하고 싶은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지요. 한걸음 더 나아가 오지인 아프리카로 가서 내 치의학 전공을 살려 마음껏 봉사해야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봉사 중 으뜸봉사는 직업을 통한 사회봉사라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땐 패기가 넘쳤지요.

그런데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치과에 몰두하다보니 이쪽 세계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당시로는 최첨단 분야였던 임플란트에 전념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개척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소문이 나면서 40년간 임플란트 치과의사로 살게 되었습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제까지 8만개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고요, 한 달에 평균 3백개의 임플란트를 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분야에서 세계 1인자로 남고 싶고, 이것이 삶의 보람이자 사명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꿈은 꾸지만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이 현실 아니겠습니까. 제가 직접 쓴 시인데요. 어떤 분야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결기에 찬 것으로,직업과 인생이란 제목입니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 자루의 삽을 쥐어도/반복되는 일만 되풀이 하는/극장의 매표원이 되더라도/그대는 전문가(Pro)가 되어야 한다/그리고 정상에 서야한다/비록 산봉우리가 낮다 해도/산봉우리에 서지 않으면/다른 산봉우리들을 보지 못하리/극과 극은 서로 통하며/직업의 정상은 예술의 정상과/흔쾌한 담화를 나눈다/.

 

-원장님의 삶에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누굽니까? 멘토라고나 할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멘토로 삼을 만한 인물을 꼽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 두드러지는 것이 현실이지요. 내가 열심히 해서 일구어낸 것이지 멘토는 무슨 멘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으니까요. 저도 전문직에 속하지만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인간 자체가 늘 불안한 존재 아닙니까. 누구든 멘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삶에서 멘토를 꼽으라면 우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과 중학교 담임선생님, 그리고 사회에서는 우리나라 임플란트계의 선구자인 김홍기 박사님과 국제 로타리 임창곤 총재입니다. 이 분들은 저에게 삶의 자양분을 한없이 듬뿍 주신 분들입니다. 멘토가 주는 가르침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장점의 발견, 선택, 성장전략, 친구, 카리스마, 조언, 성과, 후원, 격려, 열정, 인적 네트워크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멘토는 고향의 산이나 모교의 스승처럼 나를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멘티인 우리가 찾아가야합니다. 그러면 멘토는 늘 그 자리에서 반가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일 년에 한 번도 좋고 두 번도 좋지만, 일부러 우리가 찾아가야합니다. 저는 멘토를 통해서 삶의 지혜나 지평을 넓혀왔습니다. 저가 쓴 굴미산 뫼봉이란 시가 있는데 멘토에 관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굴미산 뫼봉이 거기에/우뚝 서 있다/나에게 그처럼 용기있게 다가온 것도 없었다/그처럼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도 없었다//아침이면 늘 푸르름으로/낮이면 아득한 그리움으로/저녁이면 엄격한 감시자로서/거기 항상/그처럼 자신 있게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해거름이면 떨칠 수 없는/그의 긴 그림자에 휩싸여/타다 남은 저녁노을 바라보며/그를 원망하였다//그러나 그는 늘 거기에 있다/아침 창문을 열면/더욱 신선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사실 그렇습니다. 산은 내가 타향에 살 때도 고향에 살 때도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 여름, 가을, 겨울 없이 모습은 바뀌지만 그 산은 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멘토는 고향의 산처럼 나를 찾아오지는 않지만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반겨 맞이하지요.

"멘토는 고향의 산이나 모교의 스승처럼 나를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멘티가 찾아가야합니다. 그러면 멘토는 늘 그 자리에서 반가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라고 삶에 영향을 준 사람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조동래 기자
"멘토는 고향의 산이나 모교의 스승처럼 나를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멘티가 찾아가야합니다. 그러면 멘토는 늘 그 자리에서 반가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라고 삶에 영향을 준 사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동래 기자

 

-원장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멘티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굽니까?

멘티는 사실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 가운데도 한 사람을 꼽으라면 송준기 박사가 생각납니다. 전공영역과 사회이력이 저와 거의 같으니까요. 어떤 면에서는 제가 행운이죠. 이런 멘티를 가까이 둘 수 있다는 것이요. 제가 한 텀 앞서가면 그분은 연신 뒤따라 왔으니까요. 그분도 치과의사가 되었고, 민족통일 중앙협의회 회장, 국제로타리 총재, 영남대 AMP(최고경영자과정)회장 등 여러 직책을 거듭 이어서 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적십자사 대구지회장도 하고 있습니다. 전생에 어떤 연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1월에 뮤직비디오 감독이자 CF감독인 둘째딸 사강이가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결혼을 했는데, 송준기 박사가 주례를 맡았습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딸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흔쾌히 수락을 해줘서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원장님은 후학들을 위해 많은 장학금을 내놓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된 겁니까?

저는 살아가면서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넓게 보면 선조로부터 시작해서, 학창시절에는 선생님으로부터,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주변으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많은 덕을 봤지요. 늘 마음 한구석에는 가족, 친척, 고향, 모교에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 같은 게 있었습니다. 제가 치과병원 개업을 막 시작한 80년 초에 저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100만원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았지요. 이것이 밀알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시세로 따진다면 5백만원에서 천만원으로 추산됩니다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제로타리 재단, 모교인 계성학교, 그리고 자연보호 중앙 연맹, 바둑협회 등 수많은 단체에 기부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100만원이란 돈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와 그 돈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기부되었을 때를 가끔 생각합니다. 내게 100만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100만원을 장학금으로 받은 후학에게는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디딤돌이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잉여가치라고나 할까요, 마중물 같은 역할 말이지요. 저는 이런 생각으로 적지만 자주 기부하는 것이 나름 철학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고용노동부 장관상을 받으셨습니다. 의료인이 아닌 경영인으로서의 철학은 무엇인지요?

저도 받을 줄 몰랐습니다. 사실 표창 상신도 안했으니까요. 저는 병원을 운영하면서 나름 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직장에 보람이 있어야 일도 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가정에서 행복도 중요하지만, 하루 중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 사실 더 중요합니다. 저가 만든 신조어가 있는 데요. ‘Hostopia’, 말하자면 Hospital(병원)Utopia(낙원)의 합성어입니다. 직장이 병원인 그들에게는, 병원이 낙원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시대를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저의 소박한 경영철학이 반영된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아버지이며 누구의 남편이니까요. 아마도 이런 행복 마인드와 투명한 재무관리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장관상을 받은 것이 아닐까하고 그저 짐작해봅니다.

 

쉼 없는 기자의 질문에도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말 속에 오롯이 묻어났다. 1부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봉사의 철학에 대해서 내가 부자가 되거든 혹은 내가 여유가 있으면 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여유란 죽을 때까지 생기지 않은 법이라고 말한, 이재윤 원장의 베푸는 카리스마편은 제2부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