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有情
故鄕有情
  • 김대한 기자
  • 승인 2019.04.0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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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榮州를 떠나 安山에서 고향을 그리며 쓴 글

東으로는 태백산맥이 南北으로 뻗어있고 北으로는 소백산맥이 西南으로 뻗어 내린 소백산 자락에서 휘감아 내린 구릉들을 뒤로 하고 조금은 평평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西川을 가슴에 품은 분지 중앙에 영주시(榮州市)가 자리잡고 있다. 조그마한 평야지대의 남쪽에는 웅방산(230m) 및 연화산(266m)이, 중앙부에는 철탄산(276m) 및 서산(309m)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낙동강 상류인 서천과 그 지류인 죽계천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야트막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기차역 부근이어서 그 당시에도 사람들로 꽤나 북적거렸다. 오고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남루한 차림새에서 우리나라가 무척 궁핍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어린 시절에도 느낄 수 있었다. 때는 1960년대 초, 5.16군사 혁명이 일어난 직후에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 집 인근에 닷새장이 서는 날에는 인근 시골에서 場구경 나온 인파와 장사꾼들로 붐볐었다. 나무전골목, 채소시장, 우시장에도 남루한 차림의 시골사람들이 제각기 생산한 땔감나무며, 알 갈비(솔잎 마른 것)이며, 그리고 산나물들을 아낙네들은 보따리에 이고 지고, 남정네들은 지게에 지고 와서는 필요한 생필품과 바꿔가곤 했었다.

그 당시에는 연료가 땔감나무였으며, 석탄은 웬만한 가정에서는 구경도 못해 보고 읍장관사에서나 관공서 같은 데에서만 구경해 볼 정도였다. 솔방울도 연료가 되었으며 소나무 잎이 떨어져서 긁어 모으면 화력이 센 알 갈비 땔감이 되었다. 그 알 갈비를 깍지로 긁어모아서 차곡차곡 둥근 모양으로 몇 단씩 쌓은 것을 지게에 지고 와서는 채소시장 입구에 죽 늘어선 나무꾼들의 모습이 그 당시의 볼거리 중의 하나였다.

또 다른 장터에서는 난장이 벌어진다. 성냥도 귀했던 터라 多黃 알이라고 성냥 알을 멍석에 수북이 쌓아놓고 됫박으로 팔았다. 야바위꾼들도 한 대목을 보았다. 큰 대야에 물을 채우고 칸막이를 해놓고 그 위에 담배, 비누, 건빵, 사탕 알 등을 얹어놓고 물 방게를 가운데 뛰어놓고 물 방게가 헤엄쳐서 닿는 곳에 있는 상품을 차지하는 야바위였는데 어린 마음에 너무도 재미있어 바짝 붙어 앉아서 정신없이 보곤 했었다. 그리고 해질녘이 되면 얼큰한 막걸리 사발에 취해서 장보기 물건을 머리에 이고 생선 몇 토막을 새끼줄에 묶어서 흔들거리며 돌아가는 구수한 풍경도 사라진 모습 중의 하나였었다. 또 고무신 가게에도 사람이 북적거렸다.

그때만 해도 고무신이 주종이었다. 고무신 바닥이 다 닳아버려서 발바닥이 흙투성이인 채로 고무신을 사러 온 사람들은 비닐종이로 발을 싸서 신을 신어보곤 했다. 그 당시 유행한 것이 검정색 통 고무신이었다. 바닥을 붙인 것이 아니라 고무신 일체를 통짜로 찍어낸 신발이어서 무척이나 질겨 많이들 신고 다녔다. 조금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는데 검정색 바탕에 흰 고무테가 들어있는 요즈음의 실내화 같은 운동화였다. 무척이나 신고 싶어 했었지만 꿈이었을 뿐이었다.

사라호 태풍이 휩쓸어버린 수해를 겪은 적이 있었다. 며칠 동안 잠기었던 물이 빠지면서 시가지는 마치 폐허 그대로였다. 우리 옆집에 과자점이 있었는데 수해로 인해서 봉지속의 과자도 물을 먹어 눅눅해졌다. 그것을 동네 아이들이 서로 주워 먹던 모습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그립다. 그러한 시대에서도 아무런 탈도 없이 쑥쑥 몸과 마음이 성장했으며 동네 개구장이들은 해만 지면 빈공터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다섯깨 무시”라고 하는 요즘은 발전된 술래잡기도 했으며 다른 동네 아이들과는 편싸움도 하고 땅뺏기 놀이도 하며 흙투성인 채로 집에 들어와서는 꾸중도 다반사였다. 지금은 내 아이들이 해질 무렵까지 놀고 서는 제 엄마한데 야단맞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흘렀음을 느낀다.

이러한 추억 투성인 고향을 떠나 식솔들을 데리고 西海가 보이는 安山으로 온지도 이제 십 오년이 지났나 보다. 서해의 새벽은 희뿌연 안개와 함께 밀려온다. 파도는 보이지도 않고 철썩거림도 없이 나타난다. 새벽의 전철은 싱싱함의 하루를 시작하는 풋풋한 향내를 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더욱 좋다. 내 고향이 있는 동해부근의 영주와는 또 다른 서해의 바다 내음이 그저 좋을 뿐이다. 지금의 조그마한 평온한 생활은 지난 몇 해동안의 본의 아닌 혼란과 정신적 방황에 대한 정당한 댓가라고 생각하고 싶다.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떠나 올 때는 고향무정이었는데 부대끼며 살아가다보니 역시 고향유정이 되고 마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늘 그리운 고향 밥상
늘 그리운 고향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