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고스다 겐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철학 강의'
[장서 산책] 고스다 겐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철학 강의'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3.04.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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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근본적 질문에 답하다

저자 고스다 겐(小須田 健)은 1964년 가나가와현 출생으로 주오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상학을 중심으로 한 현대철학과 윤리학을 전공했다. 주오대학교, 세이센여자대학교, 도쿄정보대학교, 짓센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모든 철학의 핵심 질문을 일러스트와 간결한 설명으로 한 권에 담아낸 철학 입문서이다. 일반적으로 연대기 형식으로 전개되는 철학 입문서들과는 달리 우리의 일상에서 품을 법한 33개의 핵심 의문을 제기하고, 소크라테스로부터 주디스 버틀러까지 62명의 철학자의 생각과 사상을 각각의 의문과 연결해 통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폭넓은 논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목차는 ‘1장 우리를 둘러싼 의문들을 생각한다, 2장 언어를 생각한다, 3장 인생을 생각한다, 4장 정의를 생각한다, 5장 사회와 세계를 생각한다, 6장 진리를 생각한다, 7장 신과 예술을 생각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3장(57~78쪽)의 내용을 소개한다.

1.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1)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

서양에서 탄생하고 전개된 철학은 적지 않은 세월을 그리스도와 함께 보내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유일한 존재인 신에 의해 무(無)에서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의 존재 의식도 신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고 최후의 심판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말한다. 이렇게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를 의식함으로써 현실 생활을 다스리고 인생에 활기가 생긴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2) 니체의 인생

니체는 그리스도교와 같은 초월적 가치에 기대는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종교에서 다룬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이라고 갈파했다. 니체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함이 인생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회피하는 태도를 약자의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리스도교는 약자를 위한 ‘동정의 종교’이며 강자를 향한 ‘원한(르상티망)의 종교’라고 말했다.

(3) 토머스 네이글의 인생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네이글은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하고 자문하게 된다. 그러나 네이글은 이런 우유부단함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라고 말한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하고 물으면 인생의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에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같은 이율배반이야말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만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성이라고 네이글은 생각했다.

2. 행복이란 무엇일까?

(1)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동 자체에 목적이 내재된 ‘활동’과 목적이 행동의 외부에 존재하는 ‘행위’를 구별했다.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의 목적은 건축 과정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로 완성되는 집이다. 즉 행위의 목적이 집을 짓는다는 행동의 외부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집을 짓는다는 것을 활동이 아니라 행위로 정의한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 중요한 것은 감상이라는 행위 자체이다. 감상이라는 지속적인 행위 자체가 목적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즉 미술 작품감상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활동과 행위는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보다 활동을 높게 평가했다.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상태를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라고 불렀다.

(2) 벤담의 행복

무엇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누구나 특정 집단 안에서 생활하는 이상 어느 정도 가치관이 공유된다는 점이 그 답이 될 것이다. ‘공리주의’의 대표자 벤담은 어떤 집단 안에서 최대한 많은 구성원이 공통되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항이 최선이라고 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많은 이해가 충돌하고 있어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다. 이에 벤담은 설사 소수가 희생하더라고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경우를 중시했다. 다수결 원리와 마찬가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는 모두가 똑같이 만족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벤담은 이 원리야말로 사회 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알랭의 행복

카를 힐티의 ≪행복론≫(1891), 알랭의 ≪행복론≫(1925),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론≫(1930)을 묶어 3대 행복론이라고 부른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힐티는 행복을 신과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기 성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러셀은 반대로 현실 사회에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알랭은 신체를 바르게 하고 모든 것에 이성을 동원해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알랭의 ≪행복론≫은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다루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다. 웃으니까 행복한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 관념적인 정신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일상의 마음가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3. 왜 일을 해야 할까?

(1) 로크의 일

로크는 ≪통치론≫에서 소유권의 기원을 노동이라는 신체 활동과 결부시켰다.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자연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다. 자연은 공유 재산이므로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 신체를 사용한 노동은 인간 고유의 행위이다. 그렇기에 로크는 노동에 의한 산물은 개인의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일을 해야만 신의 피조물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노동은 인간에게 개성과 인격과 같은 주체성을 부여한다. 또한 로크는 노동의 산물뿐 아니라 노동의 장이 되는 토지 또한 소유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로크의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2) 한나 아렌트의 일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명체인 인간에게 생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활동이다. 그런 생물적 필연성을 뛰어넘는 활동이 작업이며, 예술 창작을 예로 들 수 있다. 행위는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노동과 작업은 개인적으로도 가능하지만 행위는 집단 활동이 전제되는데, 정치 활동이 그 예다.

아렌트에 따르면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동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작업과 행위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노동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간다고 할 수 있다.

(3) 푸코의 일

16세기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구빈법이 제정되어 질병으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먹을거리와 입을 것을 제공했다. 그러나 건강하지만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채찍형이 내려졌는데, 부랑자나 실업자 같은 사람들이 처벌 대상이 되었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중세 시대의 최대 악덕은 탐욕이었으나, 17세기에는 나태함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이 부족한 사람은 사회적 존재 의의가 결여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이런 사회 부적합자를 강제적으로 노동시키는 교정원도 세워졌다.

이렇듯 일한다는 것에 가치를 둔 인간관이 자본주의 경제의 확립과 더불어 사회 전체에 스며들었다. 노동을 인간존재의 전제로 생각하는 시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4. 살아가는 기쁨이란 무엇일까?

(1) 쇼펜하우어의 쾌락

쇼펜하우어는 생명체로서 인간의 본질은 살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본능, 즉 생명적 충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의지’라고 했다. 의지는 원래 어떠한 즐거움이나 기쁨과도 관계가 없다. 우리는 의지의 충동을 신체 행동으로 나타내고, 이해 또는 제어하려고 한다. 이런 표상 활동 속에서도 의지를 위로하고 잠깐의 살아가는 기쁨을 주는 행위로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높게 평가했다. 예술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쾌락이며 자그마한 평온이다.

(2) 키에르케고르의 쾌락

키에르케고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자신을 ‘실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느 시대의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이상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고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에 이르는 길에 몇 가지 단계를 설정했다.

첫 번째는 미적 단계로 기분이 좋아지는 쾌락을 추구하는 심미적 삶의 방식이다. 다만 우리를 매혹하는 쾌락과 아름다움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끝없이 바라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리는 도착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다음으로 외적인 목표를 좇으며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안정된 자기를 유지하려는 윤리적 삶의 방식인 윤리적 단계가 가능해진다. 나아가 키에르케고르는 최종 단계는 종교적 단계라고 생각했다.

(3) 칙센트미하이의 쾌락

진심으로 열중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자신의 모든 심리적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을 얻을 수 있는데, 칙센트미하이는 그 상태를 몰입(flow)이라고 했다. 몰입은 전형적으로 음악가나 운동 선수에게서 많이 나타나지만, 평범한 학생이나 직장인도 공부나 업무에 집중하면서 몰입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때 자신의 내면에서 평소의 시간 감각이 사라지며 주위와 완전히 일체화된다. 또한 정신이 또렷해지고 분명해지면서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는, 그런 특별한 순간이 실현된다.

5. 죽음이란 무엇일까?

(1) 붓다의 죽음

붓다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무언가를 바라거나 두려워하는 우리의 마음, 즉 집착(갈애)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별이 괴로운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에 집착한다고 했다.

그러면 애초에 집착해야 할 대상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붓다는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현재 상황이 고통스럽다는 생각도, 다음 생으로의 윤회를 마다하는 생각도 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2)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는 이교(異敎)의 신을 숭배하여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죽기 직전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도 사후를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현명하지 못한데 현명한 사람인 척하는 것과 같다. 나는 죽음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무지의 지’ 태도를 마지막까지 무너뜨리지 않은 것이다.

만약 죽음이 유물론자의 말처럼 허무로 돌아가는 모든 감각의 소실이라면 그것은 꿈 하나 꾸지 않고 숙면한 밤과 같이 행복한 것이다. 또한 죽음의 세계(하데스)가 있다면 그곳에서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그리스의 농민 서사시인)를 만나고, 신들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즉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절대 불행하지 않다고 말했다.

(3) 하이데거의 죽음

하이데거는 본래의 자신과 마주하기 위한 계기로 죽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은 본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지만 스스로 체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죽음을 ‘불가능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죽음과 마주해야 본래적 자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민과 불안의 내용은 사람의 수만큼 천차만별이며, 일률적으로 꼭 들어맞는 해답이란 있을 수 없다.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이리저리 끊임없이 생각하는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우리 일상에서 떠올릴 수 있는 질문들에 숨겨진 여러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철학에서는 어떤 사색이 이루어졌는지 간략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철학과 철학자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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