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04)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04)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2.2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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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마다 싱겁고 짜다며 사사건건 시비만 같다
비밀이란, 비밀이란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더 이상 비밀이 아니듯
사대부집 대감이 회춘을 한답시고 이팔청춘의 젊은 처녀를 사들여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소고기 산적을 필두로 삶은 닭 한 마리가 통째 들었고, 갖가지 지짐이를 비롯하여 산해진미가 가득하다.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골고루 펼쳐보는 할머니는 기가 막혔다. 일 년이 다 가도록 달구새끼(‘닭 또는 병아리’의 방언) 멱 감은 국물조차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 드는데 이런 귀한 음식이라니!, 모처럼 만에 별미를 맛본다는 흥분도 잠시 고모의 혼담에 관한 부탁은 이제 그 어디에도 할 수가 없다 여겼다. 그간 고모를 닭 소 보듯, 길가서 개똥을 본 듯 외면한 동네 총각들이 참으로 용하다 여겼다. 동네 아낙네들 역시 괜하게 얽혀서 집구석이 풍비박산으로 낭패를 당하기보다는 투명인간 취급이 최선이라 여겨 모두가 현명하게 처신을 했건만 할머니만 세상인심을 잘못 읽어 머저리가 된 느낌이다.

그럼 저 사주단자가 품은 진짜 함의 무얼까? 까닭을 알 수 없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할머니는 눈앞이 노랗다 못해 까맣다. 삽짝을 들어서는 매파를 보는 순간 이제야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시키는 대로 넙죽넙죽 절을 하고는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는지 모른다. 그런 한편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날을 얼마나 속으로 축원, 학수고대했건만 막상 닥치고 보니 발길 아래든 지렁이처럼 고통으로 꿈틀거린다는 생각뿐이다. 억울함이 일고 무명초로 무참하게 짓밟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데 달리 생각해 보니 사람 마음이 어쩌면 이토록 간사할까 싶다. 차려진 밥상이 치워질 때는 말라비틀어진 메레치(‘멸치’의 방언) 한 동가리도 아깝다 싶어 젓가락을 내밀었는데 막상 내 밥상이라 생각하니 이밥에 소고기 국도 마뜩잖다 투정하는 꼴이다. 쌀을 어디? 경기도 이천인가? 상주 함창 쌀이 좋고 소고기는 암송아지의 살치살이 마블링도 적당하여 최고라며 반찬마다 싱겁고 짜다며 사사건건 시비만 같다.

보자기를 어렵게 풀어 음식을 살피는 중간중간 앞산을 노려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끼리끼리 어울려 살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하고 중얼거리는 할머니는 당장에 재를 넘어 파혼을 주장하기에는 가진 힘이 미미하여 함부로 나설 수가 없다 여겼다. 대책 없이 나섰다가 앞선 두 집안처럼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을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귀신에 홀린 듯하여 환영하여 반겨 맞을 기분도 아니다. 사주단자만으로는 확실하게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하여 문서로 주고받고 확답을 받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중매쟁이가 대책 없이 들고 온 사주단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명예와 재물 앞에서는 자식도 버리는 마당에 철석간장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조령모개에 여반장으로 기분에 따라 바뀌는 데는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은 덜 여문 데다가 일자무식의 고모의 장래가 물가에 내놓은 아기처럼 좌불안석으로 불안하기만 하다. 앞날을 믿고서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박을 놓아 좇아내기로 마음만 먹으면, 핑계를 델라고 치면 이현령비현령으로 이유가 널리고 널리다 보니 우여곡절 끝에 성사가 된다 한들 어찌 고침(高枕)에 두 다리를 뻗어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있을까? 괜한 기분에 우쭐했다가 어느 한순간 시궁창에 처박히는 꼴을 당할지 어찌 알겠는가? 쓰다 만 휴지처럼 발기발기 찢어져 흩어질 줄 누가 알겠는가? 차후야 어떻게 되든 음식이라도 없으면 오늘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숨길 수도 있다 여겼다. 한데 사방으로 펴져 나가는 기름진 냄새가 발목을 잡는다. 그렇다고 먹는 음식을 두고 밭이랑을 파고 묻기에는 내생을 들어 받을 업이 크다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다고 숨겨놓고 먹기에는 양이 만만찮아 금방이라도 쉬어 터질 것만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뾰족한 묘안이 머릿속으로 언뜻 떠오질 않는다. 결국에 할머니는 어머니와 수양딸인 영천댁을 불러서는 사주단자에 관한 이야기는 빼고는 음식을 들어서 이유도 모르게 고모 앞으로 왔노라며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랄 수밖에 없었다.

동네에 때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비밀이란, 비밀이란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더 이상 비밀이 아니듯 초미의 관심사로 이런 중차대한 일이 어디 숨긴다고 숨겨질까? 한강에 자갈돌 던지듯 숨길 수나 있을까? 모여든 아낙네들은 할머니의 타는 속도 모르고 그동안 동네 총각들과 함께 할머니의 혼담을 못들은 체 외면한 일은 선견지명으로 잘한 일이라며 고모를 한층 추켜세워서 입담이 걸다. 느지막하게 딸내미를 잘 둔덕에 감히 쳐다보지 못할 댁으로부터 귀한 음식을 받아먹는다며 먹이를 보채는 제비 새끼들 모양 잠시도 입이 쉬질 않는다.

할머니는 동네 아낙네들이 구수회의(鳩首會議)처럼 모여들어 재잘거리며 음식들을 나누는 모습을 보는데 저승길로 떠나간 청솔댁이 못내 그리웠다. 옆에 있으면 암울한 마음을 핑계 삼아 치맛자락에 얼굴을 파묻어 한바탕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이 동생은 이제 어찌하면 좋습니까? 저 덜떨어진 내 딸 끝순이는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밑도 끝도 없는 하소연이라도 실컷 하고 싶었다. 왜 먼저 갔느냐며 마음껏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이 좋은 날에 어디를 갔느냐며 나무라서 가슴팍을 울리도록 두드리고 싶었다.

다음 날로 감골댁은 진시에서 사시로 넘어갈 즈음에 일삼아 찾아왔다. 그간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던 감골댁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할머니를 보자마자 숨기지 말고 이실직고하란다. 감골댁 앞에서는 숨길 일이 없다 싶은 할머니가 지금껏 고모로 인해 생겨난 일과 매파와의 대화를 조목조목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이야기 끝에 알 수 없다는 듯, 화가 치민다는 듯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할머니를 두고 감골댁은 천장만 물끄러미 쳐다본다.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성~님! 혹시 그 사주단자를 풀어 사성을 봤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아니! 웬걸! 언문이라면 또 모르겠거니와 온통 한문투성이라 내가 보면 또 뭘 알겠는가?”

“하긴 저도 마찬가지네요!”하는 감골댁은 다른 무언가가 생각난다는 듯 앞니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다가는 고개를 갸우뚱

“성~님! 혹 말로는 그 댁 도련님 사주라 연막을 펼치는 한편으로 진짜는 그 집 영감님 사주가 아닐까요?”하는데 할머니는 당최 무슨 소린지 몰라 멍한 표정인데

“아~ 왜? 옛날에 그런 말, 아니 그런 게 있었다고 하잖아요!”

“그런 말에 그런 거라니 자네는 시방 뭘 말하려는 겐가?”

“성~님! 혹!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

“답답해 죽겠네! 오늘따라 왜 이러는가? 가슴 답답하게 왜 변죽만 울려 자꾸만 말을 늘이는가?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그~ 그것이란 게 당최 뭐란 말인가?”하는 할머니가 감골댁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제야 마지 못 한 듯 감골댁이

“성~님! 그 있잖아요! 혹~ 그~ ‘웃방~애기!’라고 들어 보셨수!”

“‘웃방~애기!’라니 금시초문으로 나는 자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아~ 한데 성~님! 말입니다. 그 웃방애기란 것이 옛날 다 죽어가는 사대부집 대감이 회춘을 한답시고 이팔청춘의 젊은 처녀를 사들여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대감이 죽은 다음 그 가족들이 얼마간의 재물을 떼어 준다는...!”하고 말하는 감골댁은 스스로 말이 안 된다는 듯 몸서리를 친다. 하지만 감골댁의 웃방애기에 회춘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은 할머니가 어금니를 빠드득 갈며

“대명천지에 어찌 그런 일이, 날벼락을 맞아 죽어도 시원찮을 것들! 하늘이 굽어보고 땅이 올려다보고 있건만 어찌 그런 짐승만도 못한 일을 벌인단 말인가? 천벌을 면치 못하리!”

“그럼 그럼요! 그런 일들이 진짜로 참이라면 짐승 아니 벌레보다도 못하지요! 어떻게 멀쩡한 처녀의 앞길을 망쳐도 유분수지!”

“그건 그렇고, 그럼 이 사람아 그다음은? 그 처녀의 그다음이 어떻게 된다는 겐가?”하고 할머니가 치가 떨린다는 듯 말을 더듬는데 어느결에 예의 손수건을 양손으로 거머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죄 없는 감골댁을 노려보는 눈에 그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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